소설
2011.07.29 04:06

취미는 수능 - 10

(*.115.209.124) 조회 수 1795 추천 수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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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세상에서 콘돔이 가장 많이 팔리는 날.


와우 업적 <탐험가>를 땄다.


아제로스, 노스렌드, 아웃랜드 전역을 싸돌아다니고 지도를 완성시켜야 주어지는 단순하지만 시간 잡아먹는 아주 엿같은 업적이다.


달성 후 자괴감에 빠진 것은 당연하다.


다음 날은 크리스마스 였다.


크리스마스엔 안 좋은 추억 투성이다. 2007년은 게임으로 밤새다가 피곤해서 하루종일 잠든 것, 2008년은 데이트를 하긴 했지만 그 전에 어떤 못난이한테 번호를 따일 뻔 했고, 2009년은 집에서 와우하다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서 서러운 나머지 114에 전화해 메리크리스마스 해주세요 라고 애원한 것.


생각해보니 다 뭣같은 기억 뿐이다.


그리고 올해도 다를 건 없는 듯 하다.


또 와우라니.


아, 그래.


이미 포기했다. 그냥 살지 뭐. 오늘은 와갤러들이랑 오랜만에 리치왕이나 잡을까.


그렇게 와우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재수학원 다닐 적의 친구였다. 녀석이 말했다. 여자가 없으면 만들면 되는거 아니냐고.


그러자. 그래. 와우보단 그게 낫다.


녀석과 나는 술을 먹고 헌팅에 나섰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난 몹시 수줍음을 타는 츤데레라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제대로 말을 걸 수 없다. 그걸 아는 녀석은 본인이 모든 것을 담당하겠다고 나섰다.


당연한 결과지만 다 실패다. 깡그리 실패하고 여자 구경만 하던 녀석과 나는 구석에 앉아 한 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던 차에 왠지 만만해보이는 여자가 있어 녀석이 나섰고 나는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그 여자였다. 내 첫사랑.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그녀를 잡았다.


오랜만이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담담하게,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돌아서 나를 본 그녀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지냈어?


응. 너는......?


그냥. 잘 지내진 않고.


이상했다. 분명히 그 애를 다시 보면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하고 시나리오를 짜두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등, 내가 3년동안 보아온 그 애에게 최고의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연습했는데. 다시 만나니 내 자신이 무덤덤해서 놀랐다.


너는 잘 지내? 우리가 벌써 스물하나야. 와, 진짜 세월 빠르지 않냐.


이건 내 말이다.


그러게. 그 땐 우리가 고등학생이라는 것도 실감이 안났는데.


이건 그녀의 말.


여기서 "그 때"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녀가 내게 준 연애 편지에 똑같은 구절이 있어서 잘 기억한다. 그 편지들은 매일 밤 읽고 또 읽혀서 너덜너덜해졌으니까. 지금은 물론 버려졌다.


그녀의 모습을 표현해 보자면, 백지같았다. 전체적으로 흰 옷이었고 피부도 하얗고 깨끗했으며, 장신구까지도 은빛으로 빛났다.


머리도 누가 땋아줬는지 몰라도 제법 세심하게, 삐친 것도 없이 정성스레 장식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게임만 하는 폐인 답게 다크서클이 진했고, 얼굴이야 뭐 니네가 알다시피 잘났지만 옷도 대충대충 몸도 마음도 대충대충이다.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나는 비켜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재밌게 보내.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무겁게 돌아서 걸었다. 시끄러운 주변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조용한 목소리는 또렷히 들렸다.


너도 메리 크리스마스......



친구는 조금 화가 나 있었다. 자기가 혼자 고생하는 동안 내가 다른 여자랑 말하고 온 것이 문제였다. 이러나 저러나 실패인건 마찬가지라고 하며 오히려 큰소리 치니 녀석도 곰곰히 생각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할일이 없던 녀석과 나는 길을 걸었고 나는 내 친구들 중 몇몇이 애인과 함께 거리를 걷는 것을 보고 분노에 휩싸였다.


이래저래 또 시간만 보내다 녀석은 집에 갔고 나는 이 갑갑함을 어떻게 해소해야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교회오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기로 했다.


여기서 교회 오빠란 나의 오랜 친구이자 독실한 신앙을 가진 한 녀석을 말한다.


교회 오빠지만 애인이 없던 녀석은 부르자마자 편의점으로 뛰쳐 나왔다.


녀석에게 콜라를 먹이며 나는 고해성사를 했다.


놀랍게도 마음이 급속도로 안정된다.


그리고 다음 날.


내 마음 속에 그녀는 사라지고 와우만 남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낸 생일 축하와 크리스마스에 만나서 반가웠다는 메시지는 핸드폰 문자 보관함에 저장되었다.


그 것으로 끝났다고 그 땐 그렇게 믿었다.



?
  • ?
    Cab 2011.07.31 19:57 (*.205.107.236)

    크리스마스엔 역시 114 인것 같습니다.


    전화만해도 사랑합니다 고갱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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