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5월 첫째주 토요일은 그 애의 생일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기억하냐면 그 애가 내 첫 사랑인 것
도 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아닌 사람에게 편지를 쓴
날이기 때문이다.
그 애의 생일 이틀 전부터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 애의
생일인 것을 어떻게 아냐면, 싸이월드 홈페이지에 그렇게 뜨
더라.
선물을 사다줄까, 이 날 고백을 할까.
고백은 아직 너무 이른 것 같고 그냥 선물을 줄까
선물은 뭐가 좋을까. 편지라도 써야하나?
시험 하루 전 날 독서실에서 공부는 안 하고 그것만 고민하
는데 문자가 왔다. 그 애의 친한 친구인 J였다.
<얘들아 내일 모레 아이돌(그애) 생일인데 다들 축하 문자
보내주자. ㅇㅋ?>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나만의 특수성이 없
어진다. 시파시파 어쩐다냐.
결국 그 날도 공부는 날렸고 다음 날 결과는 최악으로 다가
왔다.
정확한 점수는 기억 안 난다. 그 날은 시험따위보다 더 중요
한 일이 있었으니까.
바로 그녀가 내게 문자를 보낸 것이다. 그냥 문자면 말도 안
한다.
<GDS 나 내일 생일인데 뭐 해줄거야??>
나는 실실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아무 것도 안 해줄건데?>
<헉! 너무하다 ㅠㅠ>
사실 무언가 해주고 싶어서 미치지만 어디선가 밀고 당기는
페이스... 뭐 그런걸 주워 들어서 그렇게 보낸 것이다. 사실
내 머릿 속은 그 애와 함께 영화를 보고 밥을 먹는 등의 시
뮬레이션이 계속 실행되고 있었다.
5분 쯤 뒤 그 애에게 답장이 왔다.
<그럼 나 생일 축하 편지라도 써주면 안 돼?>
축하 편지라......
<싫어.>
<왜......ㅠㅠ 내가 그동안 책 많이 빌려줬잖아.>
<그건 그래도...... 손이 아프단말야.>
<좀 해줘. 너한테만 부탁하는건데 이게 무슨 꼴이야. 애들도
시험기간이라고 다들 안 놀아주고.>
다른 문자는 보이지 않았다. "너한테만" 이 것만 내 눈에 들
어왔다.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리고 다른 애한테 안했단 보장도 없지만...... 이미 내 마
음은 써주기로 마음을 먹고 있었다.
나는 문자를 무시하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연습장 한 장을
빽빽히 채웠다. 그녀의 생일을 축하하는 편지로 말이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적으로 네가 나를 친하
게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나 역시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뭐 이런 내용이었는데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만 없
었지 거의 고백이랑 다를 바가 없었던 것 같다.
독서실을 박차고 나가 품 속의 전재산 삼천원을 꺼내 편지지
와 봉투를 산 나는 다시 독서실로 달려와 한자한자 정성스레
글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정작 그리 많은 분량은 되지 않았다. 편지 두
장을 빽빽히 채울 정도?
거기다 나는 악필이라 내용과는 달리 글도 조잡스러워 보였
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자위하며 나는 집으로 달려왔다.
선물 하나라도 사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미 모아둔 돈은 어디에 썼는지 증발했고 절박한 내
눈에 동생이 얼마 전 남자 애들한테 선물받아온 머리핀이 하
나 보였다.
참고로 내 동생은 보슬이라 이것저것 많이 온다. 그리고 신
경도 안 쓴다. 저거 하나 쯤이면...... 아니, 둘 정도는 가
져가도 안 들키겠지.
나는 그녀가 쓰면 어울릴법한 머리핀을 골라 쥐었다.
서랍을 뒤적이자 돈이 조금 더 나와 포장도 할 수 있게 되었
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후 11시 40분 쯤에 나온 나는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한 숨을 쉬었다.
용기를 내기 위해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녀도 날 좋아한다. 아마 잘 될
것이다.
10분은 금방 지나갔지만 나머지 10분은 정말 미친듯이 느렸
다. 5분쯤 남았을 때 나는 미리 써둔 문자를 보냈다.
조금 일찍 가자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러겠다고 했고 10분 쯤 뒤에 가방을 들고
나왔다.
때는 00시 07분 경이다.
7분 전에 17세가 된 그녀의 모습이 눈가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감이 급격히 사그라 들었다.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 나는 크리스마
스 분위기가 풍기는 편지지를 내밀었다.
계절감이 영 아니지만 그 것을 고른 이유는 거기에 쓰인 <사
랑해>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이거 써줬네? 고마워!"
그녀는 내가 여태껏 본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우면 매점으로 갚아."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포장한 머리핀을 건넸다.
"선물."
그렇게 말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달아 올랐기 때문
이다.
"이게 뭐야?"
"이따가 풀어봐. 지금 풀면 도로 뺏어간다."
"알았어. 고마워. 정말. 아무것도 안 해주는 줄 알고 있었는
데."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의 볼을 쿡 찔렀다.
"편지는 시험 끝나고 꼭 답장해줄게. 집에 가자."
"어."
나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처음으로 주는 것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행복이 계속 됬으면 좋겠다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그 날도 고백하지 못했다.
시험 마지막 쯤에 내게 또 다른 여자 아이가 다가왔다. 아무
리 생각해도 이 때랑 올해 재수할 때가 내 인기의 포텐셜이
터진 때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이전이나 이후는 여자가 없었다.
아무튼 제법 귀엽게 생긴 아이였는데 당시 내 눈에는 같은
반의 그녀밖에 없었기에 나는 그 애가 내게 주는 애정에 반
응해주지도 못했고, 때문에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고백할 타이밍을 놓쳐 고백하지 못했지만 우리 관계
는 더 가까워 졌다.
거의 반 쯤 연인이라 불러도 될 정도였다.
그걸 눈치 챈 몇몇 여자 아이들이 그 애가 내게 보이는 반응
을 보며 놀리곤 했는데 당시 경험이 없던 나는 그 반응을 그
냥 장난 치는 것으로만 받아 들였다.
하루는 그 애가 교실에서 연예인을 흉내내고 있었다.
교실 창문 밖으로 그걸 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반으로 들어
갔는데 갑자기 그 애가 급히 몸을 숨기는게 아닌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았는데, 한 여자애가 그녀에
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너 GDS앞에서 사리는거야?"
그 애는 말을 더듬으며 아니라고 했다.
"그럼 왜 그러는건데?"
"......"
"왜 말을 못하는거야? 응?"
실제로는 추궁하듯 한게 아니라 그냥 생글거리며 물은 것이
지만 당시 내겐 왠지 추궁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시 내가 좀 더 연애 경험이 있었다면 아마 좋아하며 이벤
트를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때문에
저 애들이 하는 행동이 단순히 남자들이 하는 것처럼 놀리려
는 의도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늘 그녀를 보았고 그녀도 날 누구보다 가깝게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가까울 뿐 정식으로 교제하는 관계가 아니다보니 주
변에서 그녀에게 여러가지로 작업을 걸어댔는데 그 중에 한
명이 S와 K였다.
S는 교내 일진 중 한명이었고 K는 A와 초등학교 때부터 친했
고 나와도 친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여자도 중요하지만 친구도 여전히 내게 중요했기 때문에 병
신같은 생각이지만 내가 그녀를 좋아하니 니네는 손을 떼라
라는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단순히 예뻐서 관심만 가졌던 S와는 달리 거의 대놓고 작업
을 거는 K와 그런 그를 거절하는 그녀, 그녀에게 몰래 다가
가 말을 거는 나, 그리고 그런 우리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묘
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여자들로 인해 당시 반 분위기는 아주
흥미진진했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교내 체육대회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수능으로 인해 3학년이 제외되고 1학년 2학년 전원이 참석한
대 행사인 덕분에 교내 운동장에서 예선전을 치루었는데 우
리 반 여자애들은 운동도 상당히 잘했다.
특히 그녀의 달리기가 발군이었다.
여기서 나는 한 번 더 열등감을 느꼈다. 학교마다 한두명 씩
꼭 있는 멀쩡한 몸의 저주받은 다리를 가진 남자가 나였는데
, 그녀는 단거리든 장거리든 늘 1, 2등을 차지했었다.
여자보다 느린 남자라니. 물론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예선이 끝나갈 때 쯤 나는 더워하는 남자 아이들을 위해 학
교 앞 문구점에서 물총을 사 친히 쏴주었는데 무척 불쾌해했
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쏴댔고 내게 화난 K와 S 등도 물총을
사서 쏘아댔다.
열여덟살이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초등학생처럼 물총을 쏘
고 놀던 우리는 서로 쏘는게 시들해지자 다른 아이들에게 쏘
아댔는데 그러다가 S가 의견을 냈다.
그녀에게 쏘자는 것이었다.
나는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한걸세.. 라는 개소리를 해대며
거부했지만 K는 찬성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친구냐, 그녀냐.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그녀를 택하지만 당
시엔 결정을 지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그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나는 S와 K가 사라진 틈을 타 그녀에게 내 물총을 건네 주었
다.
"이거 뭐야?"
"뭐긴..... 그 놈들 다시오면 이걸로 쏴버리라고."
그녀는 날 바라보다가 말했다.
"니가 쏴주면 안돼?"
"......"
"안 되나보네. 알았어."
그녀는 웃었지만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 하나만 말해. 너 지금 내편이지?"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내게 조금씩 다가왔다. 그
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으려고 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 갈비뼈를 뚫고 튀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말했다.
"나는 남자편이 될 수 없어. 그러니까 그 두 놈 얼굴에 쏴버
려. 알았지?"
"아, 응."
그녀는 상당히 실망한 눈치였다.
홀로 남은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얼굴을 감쌌다.
"하, 씨발......병신새끼."
내가 그동안 여자가 없었던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체육대회는 우리 반의 준우승으로 끝이 났다.
우먼 파워란 이런 것일까 할 정도로 우리반 여자 아이들은
대단했다.
공부는 물론 운동과 친목질까지 완벽했다.
체육대회 우승 반은 이과 남자 반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들
의 뒷풀이는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 여자가 없었으니까......다.
반면 우리반은 뒷풀이에서 피자를 사먹고 서로를 칭찬하며
화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남녀 성비가 10:11이라 더욱 좋았다.
단체로 하는 뒷풀이는 관심 없었고 그녀와 단 둘이서 어디론
가 가고 싶었지만 나도 그녀도 친구들이 놔주지 않았다.
나는 피시방으로 끌려 가 카오스를 했고 그녀는 영화를 보고
노래방을 갔다고 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모른척 해주는 것인지. 내 친구들은 그
녀에 대한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녀와 편지를 주고 받고 밤마다 전화 통화를 하며,
우리는 더욱더 가까워져 갔다.
그녀의 편지는 내 베게 맡에 늘 있었고 나는 밤마다 그 편지
들을 읽다 잠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글솜씨는 형편 없었다. 표현하기 모호한
것은 그림으로 표현하고 귀찮은 것은 "아 모르겠어." 등의
문장으로 대충 해치웠다.
그래서 더욱 귀여웠다.
그녀와 가까워 짐과 동시에 시험 기간에 알게 된 1학년 여학
생과도 친해졌는데, 정말 이 애에게는 동생 이상의 느낌이
안 들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이 애는 내게 뭔가 꽂힌 것 같았다.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누구에게 물어도 그랬다.
심심하면 우리 반 교실에 달려와 날 만나고 매점을 함께 가
곤 했으니까.
어쨌든 수학여행 전날 밤 아이돌과 함께 걸으며 얘기했다.
"이제 곧 수학여행이네."
"응. 정말."
"수학여행...... 재밌을 것 같아?"
내가 물었다.
"응."
"뭐가 재밌을 것 같은데?"
"그냥 애들이랑 같이 먹구 자구, 넌 기대 안돼?"
사실 나도 기대됬다. 그 기대가 이 애랑은 무척 다른 방향이
지만.
"응. 난 기대 안 돼. 야, 한라산 등반 한대잖아. 그게 재밌
을 것 같아?"
"왜? 추억이지."
"힘든 것도 추억인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와 내가
서로를 부축하며 산을 등반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
다.
"힘든 것도 추억이지."
"그건 그냥 미화시키는거야. 어쨌든 간에 사실 나도 기대는
하고 있어."
"무슨 기대?"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여기서 내가 진짜 바라는 것 '네 입
술' 을 말하면 어떻게 될까?
웃을까? 아니면 정색할까.
그녀는 분명 이 때 날 좋아했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녀가 정색을 하고 우리 사이가 틀어질
것 같았기에 다른 답을 했다.
"술!"
"술?"
"그래. 술. 술 먹을려고. 이미 애들하고 준비도 해놨어. 맛
있게 먹어야지. 안주는 치킨으로 하고."
"너, 술 잘 해? 자주 해봤나봐?"
그녀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이 때 나는 그녀가 술을 싫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나 술 약해. 물론 자주 안 해봤고. 그래도 친구들이
랑 그렇게 마시는거, 재밌지 않을까/"
"그건 그렇겠지? 근데 난 술이 싫어."
"그러니......"
그후론 말이 없었다. 어색하게 한참 걷던 나와 그녀는 언제
나처럼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갈라졌다.
"내일봐."
"응.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는 돌아섰다.
"너 카메라 있지? 들고 올거라고 믿을게!"
"아, 어."
그렇게 그녀는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
오며 생각했다.
수학여행에서 어떤 일을 해볼까. 여기서 고백할까.
같이 야경보다가 키스를 해볼까.
산 탈 때 땀 질질 흘리면 꼴 사나울텐데 어떻게 숨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