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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존나 늦었다."
 
 
 
보대리는 오늘도 바쁘다. 어젯밤, 며칠동안 야근으로 못본 애니메이션과 쇼프로그램을 죄다 다운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지만 늦잠이다.
 
 
 
보대리의 아침은 늘 이런 식이다. 아침 식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지난 주에 먹다 남긴 식빵을 잼도 없이 우걱우걱 씹어먹으며 보대리는 셔츠를 입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넣어 좌우가 어긋나버렸지만 보대리에게 그런 것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다.
 
 
 
매일 이런식이다보니 넥타이는 중고등학생들 교복에서 볼 수 있는 지퍼식으로 바뀐지 오래다.
 
 
 
엘리베이터문이 열리고 3층까지 내려가서야 보대리는 깨달았다.
 
 
 
"아, 차키!"
 
 
 
아무래도 회사 지각은 면치 못할 듯 하다.
 
 
 
보대리는 다시 자신의 집까지 올라가 차키를 집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파릇파릇한 고등학생들이 보였다. 순간 추억에 잠긴 보대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아마 저 아이들이 보기에 자기는 일에 충실한 샐러리맨일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흐트러진 와이셔츠에 부스스한 머리칼,  넥타이는 먼지와 양념으로 군데군데 얼룩져있는 꾀죄죄한 모습이다.
 
 
 
자신의 차에 도착한 보대리는 시동을 걸기 위해 키를 꽂았다.
 
 
 
하지만 엔진에선 바람 새는 소리만 들려왔다. 이 놈의 차는 또 말썽이다.
 
 
 
"아 씨발!"
 
 
 
몇 번의 바람새는 소리 끝에 보대리는 시동을 거는데 성공했지만,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주먹으로 핸들을 치는 바람에 다시 시동이 꺼져버리고 말았다.
 
 
 
이 고물차는 항상 말썽이다.
 
 
 
다시 몇번의 시도. 20여분만에 시동을 건 보대리는 비참함을 느끼며 조용히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서는 아침 뉴스가 흘러나오지만 보대리에겐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물가가 오르던 내리던 생활은 고달프고, 주식엔 투자할 돈이 없다.
 
 
 
부동산도 마찬가지다.
 
 
 
그가 스스로에게 존귀함을 부여할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뿐이다.
 
 
 
오늘도 그 곳에서 그는 절정의 쾌락을 맛볼 것이다.

 

한 편 보대리가 근무하는 A사에서는 자그마한 폭풍이 일고 있었다.
 
 
 
보대리의 상사인 김과장이 그 중심이었다.
 
 
 
올해로 서른 여섯인 그는, 일찍 결혼한 탓에 곧 중학교 들어가는 아들이 있었다.
 
 
 
아들 과외, 학원비에 등골이 휠대로 휜 그지만 매일 칼같은 정시 출근으로 부장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실세중의 실세였다.
 
 
 
그런 그에게 있어 보대리의 생활은 한심함 그 자체였다.
 
 
 
미혼이기에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아니다. 그저 게으른 것이다.
 
 
 
그리 큰 회사는 아니고 보대리 하나 없다고 회사 업무에 지장이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모두 꽉 찬 자리에 하나만 비어있는 상황은 눈에 거슬린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시계를 들여다본지 40분. 정시 출근에 정확히 35분이 초과된 시간이었다.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보대리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흐트러진 모습 그대로다.
 
 
 
급하게 뛰어온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온 몸엔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짐과 겉옷을 자신의 의자에 올려두며 출근했다는 것을 표시한 보대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또 저기서 자신의 세안을 해결한 생각인 것이다.
 
 
 
김과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의 손비누 거품을 얼굴에 잔뜩 묻힌 채 어색하게 웃는 보대리가 있었다.
 
 
 
김과장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먹이고 싶었지만 참았다. 부장이나 이사가 그를 내버려 두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김과장은 지퍼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체 했다.
 
 
 
정적 속, 보대리가 세수를 하는 소리만이 화장실 내에 가득했다.
 
 
 
김과장은 지퍼를 다시 올리고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조용히 보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보대리-"
 
 
 
"...... 네! 과, 과장님."
 
 
 
보대리는 황급히 물을 잠그고 답했다.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찰싹 달라붙은 보기 흉한 모습이었다.
 
 
 
"오늘은 왜 늦었나?"
 
 
 
"저, 접촉 사고가......"
 
 
 
"......알겠네."
 
 
 
늘하던 변명 그대로다. 접촉 사고는 무슨. 자신이 박았든 박혔든 접촉 사고 숫자만 따지면 보대리는 보험금만으로 30평형 아파트 전세는 벌었다. 그리고 설령 접촉 사고가 있었다고 해도 그 차에서 더이상 손상될 부위가 남아있을지도 의문이다.
 
 
 
김과장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문을 거세게 닫았다.
 
 
 
이제 제대로된 업무가 시작될 것이다.
 
 
 
"김과장. 이 서류들 오늘 퇴근 전까지 처리할 수 있겠나?"
 
 
 
박부장이 다가와 그에게 서류를 맡겼다. 김과장은 소리내어 "예. 알겠습니다." 라고 답한 뒤 서류를 훑었다. 이 정도면 대리들이 독단으로 처리해도 될만한 업무들이다.
 
 
 
"이건 박대리, 이건 김대리, 정대리, 그리고 이건...... 보대리."
 
 
 
보대리의 이름을 부르는데에 한숨이 섞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단 한번도 맡은 임무를 다한 적이 없으니까.
 
 
 
김과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사의 공공연한 내연녀이자 월급도둑인 미스 신에게 서류 복사를 부탁했다.
 
 
 
그가 복사를 부탁한 부분은 보대리 담당의 그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믿을 수 없으니까.
 
 
 
서류를 네 파트로 나눈 그는 대리들을 불러 고르게 분배했다. 네 대리 모두가 자신감있게 대답했고 각자의 자리로 가 자판을 두들기며 열심히 분석과 업무를 시작했다.
 
 
 
김과장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에겐 보대리의 서류 역시 처리해야하는 추가 업무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일반 회사원들과 비슷한 전개다. 하지만 보대리에겐 하나의 비밀이 있다.
 
 
 
"후후후......"
 
 
 
보대리는 음흉하게 웃으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켰다. 서류는 대충 끄적여 마무리 한 뒤다.
 
 
 
읽지도 않았고 딱히 의견도 없다. 그저 오늘 하루도 시간을 때워야지.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언제든지 대처할 수 있도록 엑셀을 작업 표시줄에 띄워둔 채 보대리는 인터넷 브라우저의 주소창을 클릭해 자신이 권력을 쥔 사이트의 어드레스를 입력했다.
 
 
 
그 곳은, 차마 밝힐 수는 없지만 디씨인사이드라는 포털 사이트에서 파생된 소규모 사이트다.
 
 
 
보대리는 그 곳의 채팅방을 관리하는 "옵퍼" 였다.
 
 
 
현실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설명해보라고 하면 하지 못할 그지만 이곳에서만은 사이트 경영의 귀재가 된다.
 
 
 
그의 나이로 밀어붙이는 정책은 사이트 운영의 핵심이 되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나이 어린 운영자들의 귀감이 된다.
 
 
 
적어도 보대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도 많은 '잉여' 들이 사이트 내에서 이런저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큭큭큭......"
 
 
 
누군가가 봤다면 보대리의 이 모습을 '흑화' 라고 불렀을 것이다. 보대리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마침 자신의 욕을 하고 있는 한 유동닉의 아이디를 클릭했다.
 
 
 
'옵퍼' 라는 자리에 앉게되면 여러가지로 바뀌게 된다. 언제나 과장에게 치이고 동료들에게 따돌림 당하던 그는 이 순간 신이 된다.
 
 
 
"IP밴. 큭......"
 
 
 
보대리는 그렇게 한 사람의 유동닉을 추방했다.
 
 
 
그리고 후 폭풍이 일었다.
 
 
 
한 유동닉의 발언이 시작이었다.
 
 
 
<보대리 저 미친새끼 또 시작이네.>
 
 
 
<오늘도 야근이냐? 병신아.>
 
 
 
<어휴 보노보지 ㅉㅉ>
 
 
 
세명 밴.
 
 
 
보대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저...... 보대리님?"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보대리는 급하게 알트 탭을 누르고 회전식 의자를 돌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 아......"
 
 
 
보대리의 위기다.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저 박주임......"
 
 
 
"아, 아 그래! 박주임."
 
 
 
보대리는 자신의 머리가 원망스러웠다. 어그로 종자들 닉은 하나하나 잘 기억하면서 실제 부하직원은 어떻게 이렇게 잘 까먹을까.
 
 
 
"저기 김과장님이 이것도 갖다 주시라고......"
 
 
 
"으, 으응? 그래......"
 
 
 
보대리는 어색하게 웃으며 김과장의 책상을 보았다. 김과장은 금속테 안경을 바로 잡으며 서류를 분석하고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미친듯이 뛰며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 같은 고급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수치다. 한없이 커다란 수치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일터.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그는 채팅을 할 것이다.
 
 
 
"고마워, 박주임."
 
 
 
"그럼 이만."
 
 
 
박주임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보대리는 한 숨을 푹 쉬며 박주임이 가져온 서류를 잠시 훑었다.
 
 
 
서류는 그에게 할당된 문서를 마무리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이었다.
 
 
 
이정도 자료가 있으면 아마 금방 작성하지 싶다. 보대리는 자신있는 모습으로 다시 채팅을 시작했다.
 
 
 
<규대성 왔능가>
 
 
 
<네디 왔능가>
 
 
 
그러고보니 최근 늘 보이던 고정닉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떠올랐다.
 
 
 
보대리의 눈에 다시 불이 켜진다!
 
 
 
<아ㅡㅡ 일베 왜이래 잡게 웃대냄새나네.>
 
 
 
한 유동닉의 불평이었다.
 
 
 
<BANIP : xxx.xxx.xxx.xx 손님_ABC>
 
 
 
"흐흐흐흐......"
 
 
 
보대리, 그의 하루는 이제 시작이다.


<BANIP 123.456.789.10. 손님_bbq>
 
 
 
<BANIP 234.567.890.12. +보대리애미창년>
 
 
 
보대리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접속자 수가 하나 씩 줄어간다.
 
 
 
건의 게시판에는 보대리에 대한 불만이, 오늘도 수많은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보대리는 개의치 않는다. 여기서 그의 '짬밥'을 능가할 자, 누구인가.
 
 
 
옛날 'SED'도 그의 폭주를 막지 못했다. 하물며 지금의 '새브'가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당연히 답은 '그럴 수 없다' 다.
 
 
 
여기서만큼은 최고의 위치를 가진 자가 바로 보대리다.
 
 
 
"어이, 보대리!"
 
 
 
입사 동기 김대리의 부름이었다.
 
 
 
보대리는 황급히 알트탭으로 엑셀을 띄운 뒤 답했다.
 
 
 
"어- 왜?"
 
 
 
"여기 프린트 잉크가 떨어졌는데 빌릴 수 없을까?"
 
 
 
"아, 어. 일로 갖고와."
 
 
 
"그럼 메일로 보낸다."
 
 
 
메일을 확인한 보대리는 김대리의 문서를 열고는 한번 훑어 보았다.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성도 높은 정리였다.
 
 
 
인쇄하기 전 보대리는 그 파일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두었다. 나중에 자신의 파일을 작성할 때 참고하기 위해서다.
 
 
 
타임 리미트는 오늘 퇴근 전까지니까 시간은 널널하다. 이제 점심시간이니까 말이다.
 
 
 
아직 여섯시간 정도가 남아있고 참고자료에 표본도 하나 도착했으니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다들 바삐 자리를 비웠다. 몇몇은 사내식당에서 해결하겠지만 또 몇몇은 외부 식당을 이용할 것이다.
 
 
 
여성 사원들과 일부 남성 사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사내 식당을 간다. 보대리 역시 마찬가지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보대리의 머릿 속은 자신이 권력을 쥔 사이트 생각으로 가득하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식사를 마친 보대리는 황급히 자신의 테이블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몇몇 '잉여' 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다.
 
 
 
<보대리 밥쳐먹냐?>
 
 
 
<야근 안하냐?>
 
 
 
<보대리 새끼 과장한테 까이고 맨날 우리한테 화풀이요 ㅋㅋㅋㅋㅋㅋ>
 
 
 
당연한 말이지만 셋 다 밴이다.
 
 
 
잡담 게시판에 항의가 빗발친다.
 
 
 
보대리는 글쓰기 버튼을 누르고 최대한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작성했다.
 
 
 
[원래 옵퍼에 대한 도발은 밴의 원인이 될 수 있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보대리의 말에 분노한 유저들은 채팅방 이용 수칙을 들먹이며 반박했지만 이미 버서크 모드에 들어간 보대리의 눈에 그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전 '새브'에게 받은 권한으로 그 유저들의 게시판 내 작성 권한 역시 박탈해 버렸다.
 
 
 
"흐흐흐"
 
 
 
보대리는 다시 음흉하게 웃었다.
 
 
 
몇몇 유저들은 아이피 우회를 통해 글을 작성했다.
 
 
 
[보대리 저새낄 빨리 안 자르면 여기 망하는거 시간 문제......]
 
 
 
다시 박탈.
 
 
 
우회하지도 못하게 광역 밴을 먹인 보대리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잽싸게 알트탭을 통해 엑셀을 띄웠다.
 
 
 
"보대리 밥은 다 먹은건가?"
 
 
 
김과장이었다. 그가 한발 한발 보대리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과장님......"
 
 
 
보대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주저 앉았다. 지금 여기서 이 사이트를 들키면 끝장이다.
 
 
 
어떻게든 사이트를 닫아야한다.
 
 
 
"보대리 자료는 어떻게 됬나? 박대리는 벌써 제출했는데, 좀 엉성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말야. 자네는?"
 
 
 
"아..... 저도 뭐."
 
 
 
보대리는 그렇게 말하며 노트북 뚜껑을 닫아 버렸다.
 
 
 
"프, 프린트만 하면 됩니다. 하하."
 
 
 
"그렇지? 보대리."
 
 
 
김과장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자네 요즘 지각이 잦아......"
 
 
 
"예. 죄, 죄송합니다."
 
 
 
"음 아직 20분정도 시간이 있구만.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깨워주겠나?"
 
 
 
"예. 알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쇼."
 
 
 
김과장은 안경을 벗고 두팔로 눈을 감싼 뒤 팔걸이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보대리는 한참동안 뒤를 돌아보며 그의 수면을 확인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가슴팍을 보아 확실히 그는 잠을 청하고 있었다.
 
 
 
보대리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절전 모드를 해제하고 패스워드를 입력한 보대리는 다시 사이트로 들어갔다.
 
 
 
오늘도 많은 어그로 종자가 보인다.
 
 
 
옛날엔 안 그랬지만 지금 이 곳은 '유머유니버시티' 라는 대학교에서 온 수많은 교환학생으로 인해 다소 분위기가 어색하다.
 
 
 
<니애미보지 블랙홀보지 흡입력 개쩔어서 빛도 빨아들이는 특수보지>
 
 
 
<어그로 종자를 밴해라.>
 
 
 
<관리 좆같이 할래?>
 
 
 
<단>
 
 
 
<타>
 
 
 
<지>
 
 
 
<아시발 겨우 저정도에 어그로 끌리네 시발 여기도 망했네.>
 
 
 
<존>
 
 
 
<BANIP xxx.xxx.x.xxx. +내가짱이얌!>
 
 
 
<BANIP ccc.ccc.ccc.cc. +호도쥬스>
 
 
 
<BANIP kkk.kk.kkk.kk. 으앜이>
 
 
 
<BANIP ttt.tt.ttt.tt. 손님_kss>
 
 
 
불만을 토로하는 교환학생들과 늘 있는 고정닉, 오랜만에 온 올드 유저까지, 보대리는 모두 파.괴.했.다.
 
 
 
그리고 그 때, 모니터의 차가운 빛 아래에서 그늘을 만들며 음흉하게 웃던 보대리의 귓가에 김과장의 목소리가 파고 들었다.
 
 
 
"보대리- 서류는 다 작성한거겠지?"
 
 
 
유황불이 들끓는 지옥이 있다하되 지금 이 순간 김과장의 눈빛보다 더 뜨거울까.
 
 
 
김과장은 정말로 화난듯했다.

보대리의 미간을 타고 식은 땀 한 줄기가 흘러 내린다.
 
 
 
"다-당연하지요. 과장님. 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입니다."
 
 
 
"그렇지?"
 
 
 
김과장은 흐트러진 옷깃을 바로 잡으며 보대리의 어깨를 토닥였다.
 
 
 
"믿고 있어."
 
 
 
음절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고 딱딱 끊어지는 것은 보대리의 귀에 들린 환청만이 아닐 것이다.
 
 
 
"과장님!"
 
 
 
이번에 문을 연 것은 또다른 대리들이다.
 
 
 
보대리를 빼고 식사를 했는지 사이좋게 들어와서는, 앞다투어 김과장에게 서류를 제출하는 대리들의 모습을 보며 보대리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모두 입사동기 아니면 후배들이다.
 
 
 
"오오, 다들 수고했어. 이런 식으로 몇번 더 고생해달라고. 다음에 한턱 쏘지."
 
 
 
"저희 한우 아니면 안 먹는거 아시죠?"
 
 
 
"알지, 이 뱃살 친구야. 하하. 것보다 이나 좀 닦고 오라고. 김치냄새 나니까."
 
 
 
"예! 과장님."
 
 
 
언제 저렇게 친해졌는지-
 
 
 
보대리는 위화감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친목 ㄴㄴ 닉 ㄴㄴ'
 
 
 
점심 시간도 곧 끝이고, 여직원들도 하나 둘 커피잔을 든 채 들어오고 있었다.
 
 
 
"어이 보대리. 아깐 고마웠어. 이거라도 들고 하라고."
 
 
 
김대리가 오렌지 주스 한 캔을 그의 노트북 옆에 놓으며 말했다.
 
 
 
"어라. 이건 뭐야. 야- 보대리, 보대리도 여기 다니나?"
 
 
 
노트북 화면을 보던 김대리의 얼굴이 보대리와 좀 더 가까워졌다.
 
 
 
"응? 아, 어. 재밌잖아."
 
 
 
"그래. 여기 자료 재밌지. 요즘은 좀 우편향적으로 된 것 같지만. 보대리. 혹시 여기 고정닉이야?"
 
 
 
김대리가 보대리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보대리는 얼굴이 시뻘개지는 것을 느끼며 살짝 틀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서다.
 
 
 
"고, 고정닉? 아, 아니. 그런건 아닌데."
 
 
 
보대리가 한껏 긴장해 말을 더듬었다.
 
 
 
"오, 낮에도 이렇게 사람이 많구만. 난 퇴근하고 들어가서 몰랐는데. 보대리 그럼 힘내라고."
 
 
 
김대리는 보대리의 의자를 툭 치고는 웃으며 빠져 나갔다.
 
 
 
보대리의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히 젖어 있다.
 
 
 
'너무 긴장했나.'
 
 
 
보대리는 티슈를 뽑아 땀을 닦으며 다시 몇명을 추방했다.
 
 
 
<내가 저 새끼 좆같아서 코셔로 간다.>
 
 
 
<너 마뇽이지? 이 씨발년아. 너 밴.>
 
 
 
<마뇽아닌데?>
 
 
 
<BANIP asd.fgh.jkl.qwe +마뇽아니라니까>
 
 
 
마뇽은 보대리가 극도로 싫어하는 한 여성 유저였다.
 
 
 
물론 추방당한 인물은 마뇽이 아닌 다른 유저였지만 보대리의 눈에는 그놈이 그놈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퇴근까지 제출해야할 서류의 타임 리미트도 가까워진다.

퇴근 시간은 정확히 오후 일곱시다.
 
 
 
경기나 업무에 따라 30분씩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하지만 오늘, 보대리는 야근이다.
 
 
 
야근이라는 말에 기분 나빠진 것은 보대리 뿐만이 아니다.
 
 
 
김과장도, 박부장도, 박대리와 김대리도 모두 안색이 일그러졌다.
 
 
 
박주임은 남자친구와 영화를 보러가기로 한 약속을 또 못 지켰다며 울먹였다.
 
 
 
"어이, 김대리! 보대리! 서류는 다 작성했나?"
 
 
 
김과장의 외침이었다.
 
 
 
"아, 예! 과장님. 깜빡했네요. 보대리 테이블에 있는데. 보대리, 이따가 과장님한테 같이 좀 제출해주겠어? 난 화장실이 급해서."
 
 
 
김대리는 겸연쩍은듯 웃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보대리, 빨리 제출하게."
 
 
 
"예."
 
 
 
보대리는 갈등에 휩싸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덜했기 때문이다.
 
 
 
"아 예, 예. 자, 잠시만요."
 
 
 
보대리는 황급히 엑셀과 파워포인트를 굴려 몇몇 수치값을 바꾸었다.
 
 
 
그리고 작성자를 자신으로 바꾸어 다른 이름으로 저장, 김대리의 것과 함께 인쇄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 그냥 일이나 할걸.'
 
 
 
매일하는 후회지만 오늘도 또 한다. 퇴근하면서 내일은 열심히 하리라 다짐할테지만 또 쇼프로그램과 밀린 드라마를 다운 받아 보며 늦잠을 잘 것이고 내일도 지퍼식 넥타이를 올리며 황급히 집을 나설 것이다.
 
 
 
매일이 이랬다.
 
 
 
사실 이때까지 버틴게 이상할 정도다.
 
 
 
"여, 여기......"
 
 
 
보대리는 손을 부들부들 떨며 두 파트로 쪼갠 문서를 김과장에게 건넸다.
 
 
 
김과장은 두 문서를 조용히 훑어보더니 나즈막히 말했다.
 
 
 
"역시- 둘다 실망시키지 않는군."
 
 
 
보대리가 고개를 숙인 사이에 김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도 승진은 글러먹은 것이다.
 
 
 
"휴우- 가보게."
 
 
 
보대리가 자신의 자리로 가는 동안 김과장은 보대리의 문서를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이번 일은 사장에게 보고가 가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심각하다.
 
 
 
"어, 보대리! 제출은?"
 
 
 
그새 일을 마친 김대리가 손의 물기를 털어내며 웃었다.
 
 
 
"했어."
 
 
 
"고마워. 역시 입사동기 뿐이라니까. 다음에 동기들끼리 한 잔 하자고."
 
 
 
"응."
 
 
 
보대리는 자리에 앉아 다시 그가 운영진인 사이트에 들어갔다.
 
 
 
<야이 씨발 또 야근이야 아오 좆같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또야근이랰ㅋㅋㅋㅋ>
 
 
 
야근이라고 놀린 놈 역시 밴.
 
 
 
전기를 아낀답시고 사장은 에어컨도 틀어주지 않는다.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만이 사무실을 채웠다.
 
 
 
보대리의 회사는 현재 인근의 무역회사와의 거래양을 늘리기 위해 여러가지로 혼잡한 상황이었고, 이번 거래로 인해 좀 더 큰 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이기에 모두 최선을 다했다.
 
 
 
박부장은 정년 퇴직 후 노후를 위해.
 
 
 
곧 정년인 박부장을 뒤이을 김과장은 먼 미래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김대리는 소꿉친구이자 현재 애인인 최양과의 결혼을 위해.
 
 
 
박주임은 남자친구가 없을 때 자신의 발이 되줄 자동차를 위해.
 
 
 
모두 박카스를 물처럼 마셔가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통화를 했다.
 
 
 
그 와중에도 보대리는,
 
 
 
<맨날 야근하는데 연봉 안오르는 보대리 인생 vs 디씨하지만 아직 고1인 민성이 인생>
 
 
 
<BANIP qwe.rty.ui.op +걸리비>
 
 
 
고등학교 1학년과 싸우느라 바빴다.
 
 

 


어쩌다 이렇게 됬을까.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젠 되돌릴 수 없다.
 
 
 
스스로 모순된 감정을 느끼며 보대리는 문을 열었다. 식은땀이 흐르며 목젖이 한번 크게 들썩인다.
 
 
 
보대리는 긴장하고 있다.
 
 
 
현재 시간 9시 30분. 모두 야근으로 지쳐 간단한 야식과 함께 친목을 도모하러 요 앞 편의점에 간 사이, 보대리는 금단의 구역에 숨어 들었다.
 
 
 
보대리가 스며든 어둡고도 세련된 공간, 그곳을 여는 문에는 세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장실.
 
 
 
보대리의 한 손에는 과일촌 포도쥬스 100%와 박주임이 정성스레 닦아둔 머그잔이 있다.
 
 
 
검지 손가락을 머그잔의 손잡이에 끼우고 다른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쥬스의 뚜껑 부분을 집은 채, 창 밖의 네온사인들을 보며 보대리는 당당히 섰다.
 
 
 
영화의 한 장면이 이 순간 그의 눈 앞에 펼쳐진다. 지금 이순간 이곳은 서울의 한 구역이 아닌 저 먼 아메리카 대륙의 라스베가스다.
 
 
 
창문 앞에 서 있는 남자도 보대리가 아니다. 이순간 보대리는 라스베가스에 별장을 소유한 동부 아메리카의 명문 부호다.
 
 
 
"토미-"
 
 
 
보대리는, 아니 이제 유럽의 대 부호 'Bans' 씨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올백머리에 나비 넥타이를 맨 중년이 걸어 나온다.
 
 
 
"따라."
 
 
 
그리고 Bans 씨의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목소리는 김과장을 닮았다.
 
 
 
"예- 주인님."
 
 
 
꼬록 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그잔에, 아니 이젠 굽은 잔에 얇은 목, 우아한 받침대를 가진 와인잔에 신의 물방울이 담긴다.
 
 
 
Bans 씨는 말없이 한모금 들이킨 후 탁 소리를 내며 사장실 탁자에 잔을 올렸다.
 
 
 
"아름다운 밤이지. 그렇지?"
 
 
 
Bans 씨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웃었다. 보대리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오늘 밤엔 저 카지노로 가봐야겠어. 듣자하니 Hollywood의 유명 배우가 단골로 찾는 곳이라던데."
 
 
 
"주인님이 가시기엔 너무 수준이 낮은 곳이 아닐지......"
 
 
 
"자네, 그 곳에 가보지도 않고 가치를 매기지 말게. 나보다 능력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가치는 있는거야. 암...... 그렇고 말고."
 
 
 
늘 자신넘치던 Bans 씨의 입가에 쓴 미소가 흐르며 말의 끝이 흐트러졌다.
 
 
 
"자네 설마 늘 그런식으로 일해 온건가?"
 
 
 
"죄, 죄송합니다."
 
 
 
고개 숙이는 중년의 남자의 뒷통수는 영락없이 김과장을 닮았다.
 
 
 
한참을 말없이 Bans 씨는 머그잔, 아니 와인잔을 들이켰다.
 
 
 
사막에서 한참을 헤메다 발견한 오아시스에서 퍼낸 성수같이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달콤한 음료였다.
 
 
 
Bans 씨가 잔을 들었다 놓는 소리만이 텅빈 사무실에 가득했다.
 
 
 
"그러고보니 자네는 늘 오만했어. 내 밑에서 일하는게 그리 대단한 일인줄 아나?"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하다는 말로 되는게 아니네. 그런식으로 매사에 남을 무시하면......"
 
 
 
"......"
 
 
 
"아닐세."
 
 
 
"아닙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고개를 숙인 후 드는 중년 남자의 얼굴은 김과장과 거의 같았다.
 
 
 
"조심해주게.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정말 크게 화날지도 모르니까."
 
 
 
"예. 주인님."
 
 
 
"아 참, 그러고보니 그건은 어떻게 됬나?"
 
 
 
"서부의 j 가의 따님과의 혼담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이름이 pure 라고 하였나. 풀 네임 pure. j. 순수한 j라......"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pure. j. 씨의 현재 애인, Sed라는 친구로 인해 pure 님께서 마음을 정할 수 없는 듯 합니다."
 
 
 
"Sed 라는 친구는 뭐하는 친구인가."
 
 
 
"지하철에서 안전 요원으로 근무하고 있고 취미는 뉴욕 양키스의 경기를 보는 것이라고...... 그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으음...... 그런가. 본인이 싫다면 놓아줘야지. 어쩌겠나."
 
 
 
Bans 씨는 쿨한 척 와인을 마무리하고 웃었지만 씁쓸했다.
 
 
 
"이만 물러나보게."
 
 
 
"예."
 
 
 
Bans 씨는 가죽 등받이 의자를 꺼냈다. 그리고 몸을 깊숙이 묻고 조용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두 다리를 꼬아 책상 위에 올려둔 채 팔짱을 끼었다.
 
 
 
"후우...... 인간들이란......"

다시 한 잔을 따랐다.
 
 
 
적자색의 액체를 보며 bans는 희미하게 웃었다.
 
 
 
"난 말야. 이 세계가 싫어......"
 
 
 
Bans 씨의 눈동자에 보대리가 비친다. 그는 너무나 나약한 존재다. 라스베가스에 별장을 소유한 Bans 씨와는 달리 한국의 작은 방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먹고사는 보대리.
 
 
 
Bans 씨에게 물처럼 흔한 와인도 보대리에겐 1년에 한번 먹을까말까한 진귀한 음료다.
 
 
 
"큭큭큭......"
 
 
 
Bans씨는 창문을 열었다.
 
 
 
"하하하하!"
 
 
 
한번 웃은 뒤 다시 한 모금.
 
 
 
그리고 Bans 씨의 눈동자에 다시 한 영상이 맺힌다.
 
 
 
아까 비서가 사라진 곳에 흑발의 미녀가 나타났다.
 
 
 
보대리의 뒤틀린 욕정이 Bans 씨의 힘을 빌어 형상을 취했다!
 
 
 
"Bans 씨."
 
 
 
생긴 것만큼 끈적끈적한 목소리다.
 
 
 
"마리아."
 
 
 
보대리의 컴퓨터에 존재하던 혼혈의 미녀는 요염한 자세로 걸어와 사장의 책상 위에 허벅지를 걸쳤다.
 
 
 
"한잔 하겠소?"
 
 
 
Bans 씨는 잔을 내밀었다. 마리아가 받았다.
 
 
 
"이 향. 좋은 술이네요. 어디거죠?"
 
 
 
"그런건 중요하지 않잖아."
 
 
 
Bans 씨는 팔짱을 낀 채 그녀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Bans 씨의 허리가 느슨하게 풀어진다.
 
 
 
 
 
한편, 김과장은 김대리와 박주임에게 컵라면을 사먹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가 볼 땐 어떤가?"
 
 
 
박주임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보대리 님은...... 어......"
 
 
 
"너무 난처해 하지말고 말해주게. 솔직히 말해서 많이 화가 난단말야. 난. 매일 지각에, 맡은 업무도 대충대충에 성격도 어딘가 엉성하고. 그러면서도 동기들이나 후배들한테 열등감은 가지는 것 같고."
 
 
 
"과장님, 하지만 보대리 말도 들어 봐야죠. 무슨 고민이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래도 입사 동기라고 김대리가 편을 들었다.
 
 
 
그리고 박주임의 흔들리던 눈빛이 차츰 가라 앉았다. 입술을 몇번 지근거리던 박주임은 두 손을 모은 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화, 확실히...... 보대리님은 근무 중에 이리저리 화들짝 놀라는 일이 많으세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조금...... 불쾌한 웃음을 지으시고. 근데 그것이 또 여사원을 향한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딱히 신경은 안 썼지만, 생각해보면 시선은 늘 화면에 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시 회사 컴퓨터로 야한걸 보는건 아닌지."
 
 
 
"그런 일은 아닐걸세. 거의 모든 사이트를 차단해놨으니. 그래도 모를 일이군."
 
 
 
"하, 하지만 과장님. 그런건 아닐겁니다. 아무리 보대리가 굶주렸어도 회사 컴퓨터로 그러리라곤......"
 
 
 
김대리가 보대리의 편을 들며 외쳤다.
 
 
 
"그래. 그건 아니겠지. 정신이 박혔으면 말야."
 
 
 
그 때 김대리의 머리에 하나의 사이트가 떠올랐다. 아까 보대리가 보던, 그리고 자신이 퇴근 후 들어가던......
 
 
 
'설마......'
 
 
 
보대리는 고정닉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믿고 싶어. 보대리. 설마 아니겠지......'
 
 
 
"오늘도 내가 미리 그 친구 파트를 빼돌려놔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거래 망칠 뻔 했어. 감봉을 넘어서 스스로 직장을 말아 먹을 뻔 했다고. 이정도 참아준 것도 한곌세."
 
 
 
김과장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이번엔 김대리도 아무 말하지 못했다.
 
 
 
"그럼 김과장님은 어쩌실 생각인가요?"
 
 
 
침묵을 깬 것은 박주임이었다.
 
 
 
"며칠 유예를 주고 맡은 바를 못해내면 정말 사장님께 진지하게 보고 드려야지. 좌천되든 실직되든 난 이제 해줄만큼 해줬으니. 자, 들어가지. 이제."
 
 
 
"네."
 
 
 
"예."
 
 
 
세사람과 그 외 사원들은 조용히 회사를 올려다 보았다.
 
 
 
새까만 고층 빌딩에 한 층의 유리창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저기가 그들의 회사, 그리고 보대리의 회사다.
 
 
 
 

"응? 보대린 어디간거지?"
 
 
 
사무실 문을 연 김과장의 말이었다.
 
 
 
"화장실이라도 간거 아닐까요."
 
 
 
김대리가 말을 받았다. 김과장은 무언가 짚히는게 있는지 보대리의 책상을 뒤적였다.
 
 
 
역시, 서류에 진전은 없다.
 
 
 
"김대리, 화장실로. 박대리, 휴게실로 가서 보대리가 있는지 봐주겠나?"
 
 
 
"예."
 
 
 
"예."
 
 
 
다른 대리들에 비해 몸집이 큰 박대리가 땀을 닦으며 휴게실로 향했다.
 
 
 
"어이, 보대리. 있어?"
 
 
 
하지만 휴게실은 텅비어 있었다. 김대리가 간 화장실도 마찬가지다.
 
 
 
"보대리, 어디로 사라진건지."
 
 
 
김과장이 혼잣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어?"
 
 
 
박주임이 자신의 책상 위를 보더니 의문사를 던졌다.
 
 
 
"왜 그러나, 박주임?"
 
 
 
"아..... 컵이......"
 
 
 
컵이 없었다. 박주임이 아끼는 고급 머그잔이 사라져 있었다.
 
 
 
"음? 누가 포도쥬스 다 마셨어요?"
 
 
 
박대리가 냉장고를 연 채 말했다.
 
 
 
"아니 분명 어제 사놨는데 그럴리가......"
 
 
 
김대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포도쥬스와 머그잔, 그리고 보대리."
 
 
 
김과장이 중얼거렸다.
 
 
 
"휴게실에도 없고 화장실에도 없고 자기 자리에도 없다. 옥상은 잠겨 있을 시간이고, 단순히 무언가를 마시기 위해 다른 사무실로 찾아갈리도 없고, 그럼......"
 
 
 
김과장의 허리가 홱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사장실이다.
 
 
 
"설마......"
 
 
 
김과장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김대리, 박대리. 따라오게."
 
 
 
"예?"
 
 
 
"또 어디 갑니까?"
 
 
 
김과장의 부름에 반문을 제기하면서도 두 대리는 뒤를 따랐다.
 
 
 
"어쩌면 몹시 실망스러운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몰라."
 
 
 
김과장은 사장실의 명패 앞에서 잠깐 멈칫했다. 설마 보대리가.
 
 
 
믿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설명이 안되지 않는가.
 
 
 
"설마."
 
 
 
김과장의 손이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레 소리없이 문고리가 돌아간다.
 
 
 
그리고 보대리는, 팬티 바람으로 가죽 의자에 몸을 묻은 채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엔 머그 잔을 들고,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것은 포도쥬스다.
 
 
 
"자, 자네...... 뭐하는건가!"
 
 
 
김과장의 외침에 눈을 감고 있던 보대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바지를 올리다가 스텝이 꼬여 잠깐 주춤거리고, 결국 남은 포도쥬스를 바지에 흘리며 보대리는 일어섰다.
 
 
 
"무슨 일이에요?"
 
 
 
외침을 들은 박주임이 급하게 달려왔고 보대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세...... 세상에."
 
 
 
박주임이 입을 감쌌다.
 
 
 
보대리의 바지는 포도쥬스로 적셔져 있고 손에는 그녀가 아끼는 머그잔이 있다. 남자친구가 준 선물이다. 회사에 취직한 날, 좋아하는 커피 실컷 타먹으라고.
 
 
 
박주임의 시선이 보대리의 온몸을 훑었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하반신의 덜 잠근 바지가랑이 사이로 팬티가 보인다.
 
 
 
마치 아내에게 불륜을 들킨 후 급히 수습하는 대머리 중년의 모습이- 그녀의 철없던 10대 시절 잠시 만났던 그녀의 후원자다. - 떠올랐다.
 
 
 
"뭔 짓이야, 이 씨발새-끼야!"
 
 
 
괴로운 기억에 박주임은 머리를 감싸며 주저 앉아 버렸다.
 
 
 
"기, 김과장님...... 김대리, 박대리. 이건......"
 
 
 
보대리가 손을 가로저으며 서서히 다가온다. 그리고 바짓단이 내려가 그만 넘어지고 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머그잔이 깨진다.
 
 
 
그리고 보대리의 회사 생활도 그렇게 끝이 났다.
 
 
 
 
 
간단한 에필로그.
 
 
 
 
 
탁하는 소리와 함께 소줏잔이 플라스틱 테이블을 두들겼다.
 
 
 
"후우."
 
 
 
대충 메운 시멘트 바닥의 불균등 때문에 등받이가 없는 의자는 까딱거린다.
 
 
 
그 일이 있고도 몇달이 흘렀다.
 
 
 
서울에서 충청도로 좌천된 보대리는 오늘도 술로 하루를 보낸다.
 
 
 
생활은 그리 달라진게 없다. 다만 전체적으로 회사 분위기가 여유로워졌을 뿐.
 
 
 
김대리는 얼마전에 결혼한다는 연락이 왔다. 김과장의 화는 안풀렸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그 날 처음으로 박주임이 험한 소리를 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겠지. 그 아끼던 머그잔이 깨져 버렸으니. 엉성한 솜씨로 붙여 보았지만 가능할리가 없다.
 
 
 
어쨌든 그 억양이나 태도를 보아 옛날엔 제법 놀았던 모양이다.
 
 
 
보대리는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소줏잔을 채웠다.
 
 
 
한 남자가 조용히 들어오더니 소주 두병을 시키곤 주위를 둘러보다 보대리 맞은 편에 앉는다.
 
 
 
"회사 문제죠-?"
 
 
 
보대리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솔직히 잘 생긴 남자다.
 
 
 
"그리고 인터넷 문제."
 
 
 
보대리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알아요?"
 
 
 
"저 역시 그런 표정을 짓고 살았으니까요."
 
 
 
남자는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연예인 사진을 올리다가, 친목종자로 몰려 제 발로 나갔어요. 아니, 추방당했다고 해야하나."
 
 
 
보대리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시연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인지 들어도 되겠습니까? 저도 해드릴테니."
 
 
 
한참을 말없이 있던 보대리는 소줏잔을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채팅방 관리자입니다......"
 
 
 
눈 오는 겨울 밤 두 남자는 서로의 인연이 그렇게 이어지는 것도 모른채 대화를 나누었다.
 
 
 
밤은 깊어지고 점점 추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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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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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보부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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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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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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