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문학 게시판
랜덤

빵셔틀 3화

오
오타쿠첨보냐Lv.71로스터
15년 전인 2011년 6월에 올라온 글이에요 · 댓글은 지금도 달 수 있어요

도훈이 학교에 전학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었다. 지옥과도 같은 중간고사도 거쳤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빵셔틀 연합회의 집회에서 서로간에 정보를 교환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도훈도 이제 제법 주변 사정에 밝게 되었다.
 
우선 재현의 말은 대부분이 사실이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희빈을 그리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누군가가 나서 희빈을 응징해주길 바라는 아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지 않는 이유는 이미지 관리에 대한 치졸한 생각들, 혹은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없는 희빈의 가소로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재현의 의도 역시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우선 교내의 재현에 대한 평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교우 관계도 우수하고 성적 역시 좋았다. 그러면서도 장난칠 때는 장난도 쳤고 학급 행사 때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아이들 사이에 평판이 좋았다.
 
하지만 빵셔틀 연합회 내에서의 재현의 평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좋은 녀석이다. 혹은 사락고등학교에서 가장 악랄한 녀석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도훈은 알 수 없었다.
 
형진은 재현과 떨어지는 것이 사는데 도움될 것이라고 하고, 집회에서 새로 사귄 병주는 '그 놈은 좋은 놈' 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재현을 싫어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에 대부분 음침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도훈은 재현과의 친밀도를 쌓고 싶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형진의 흐느끼던 모습이 떠올라 쉽게 다가가질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고뇌를 거듭하는 나날 속에서도 도훈은 빵을 배달하고 있었고 그 날, 도훈이 평생을 기억할 날에도 그는 빵을 사 교실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후, 도대체 이런 식으로 해서 어떻게 1년 뒤에 학교를 제패한다는 걸까?'
 
도훈은 한 숨을 쉬며 한 달 전의 일을 회상했다.
 
빵셔틀 협회에 새로운 회원으로 들어가던 그 날, 초대 회장 박진헌이 건넨 한 잔의 맥주를 그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 그 날 초대 회장을 제외한 누구보다도 더 큰 박수를 받았다.
 
"대, 대단한데? 어떻게 술을 원샷할 수가 있지?"
 
형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등을 두들겼다. 겨우 맥주 한 잔 원샷하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지만 형진의 정말 감탄한 듯한 눈빛을 보니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그래. 그냥......"
 
그냥 마셨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도훈은 내장에서 타오르듯 달아오르는 알콜의 기운을 억제시키기 위해 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병주는 유심히 지켜보더니 감자 튀김 하나를 베어 물며 물었다.
 
"너 전학생 맞지? 일주일 전 쯤에 전학왔던."
 
"응? 아, 응."
 
도훈은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D반이라. 힘들겠어."
 
"......?"
 
"그래도 걔 있으니까 어떻게 잘 버텨봐. 그 누구냐...... 그래, 김재현. 걔한테 잘 말하면 꽤나 편하게......"
 
"뭐?!"
 
병주의 말에 반응한 것은 도훈이 아닌 형진이었다. 형진은 여드름 가득한 얼굴을 붉히고 두 눈을 부릅뜬 채, 토끼같은 앞니를 부들부들 떨며 병주를 노려 보았다.
 
"다시 말해봐! 임병주!"
 
"뭐야? 왜 흥분하고 지랄이야."
 
병주는 형진의 분노를 '지랄' 이라는 단어 하나로 가볍게 일축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저 새끼 말 듣지마. 저 새낀 구제불능의 오타쿠 새끼니까. 넌 임마, 재현이 욕할 자격도 없어. 니들이 한 짓을 생각해봐."
 
"뭐! 우, 우리가 뭐, 뭘!"
 
이 때 형진은 호프집에 들어오기 전과 마찬가지로 말을 더듬었었다. 하지만 도훈은 둘 사이에서 당황하며 그 사실을 흘려 넘기고 말았다. 도훈의 테이블이 시끄러워지자 주변의 다른 회원들 역시 그 것을 알아채고 하나 둘 씩 사락고 1학년의 테이블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집회 내에서 싸움은 금지인 거 알지?"
 
"그래. 쫓겨나기 싫으면 당장 그만 둬."
 
"우리는 힘을 아껴야 해. 내일도 일을 해야할거 아냐."
 
다른 회원들은 이런 위협 반 조언 반 식으로 이들의 싸움을 말렸다.
 
그들의 주목을 끌자 병주와 형진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더니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너 조심해라."
 
"너야 말로 헛소리 하고 다니지마. 이 오타쿠 자식아."
 
중국에서 귀국한 첫 날 빵셔틀의 의미를 알아보며 오타쿠, 은따, 전따 등의 속어도 자연스레 알게 된 도훈은 병주의 행동이 형진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사람들은 오타쿠를 싫어하는 것일까?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취미 생활을 찾아할 뿐인데.
 
형진이 화장실에 간 사이 도훈은 병주에게 오타쿠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왜 싫냐고? 역겹잖아. 그 놈들은 현실에서 도피해서 가짜 현실에 안주하는 놈들이야. 역겹지 않냐? 그 외에도 말이지...... 아니, 네가 어울리다 보면 알거야. 참고로 사락고에서 오타쿠들이랑 어울리는 건 '나 죽여줍쇼.' 하는 거니깐 참고하고."
 
병주는 화장실 방향을 힐끗 돌아 보았다. 어느 샌가 형진이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병주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자세한 것은 재현이한테 물어봐. 윤형진이 친하게 지내자고 한다면 금방 얘기해줄걸?"
 
그리고 더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모두들 조용히 앉아 음식을 먹고, 몇몇 빵셔틀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지키지 못할 결심을 얘기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모두들 모범적인 학생을 자처하는지 청소년들이 피시방이나 노래방같은 유희 시설에 출입할 수 없는 오후 열 시가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고 도훈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일주일이 세 번 지났다.
 
형진과는 그 때 편의점에서 함께 음식을 먹은 것과 메신저에서 가끔 대화를 주고 받는 일 외에는 더이상의 교류가 없었고 메신저에 병주가 새롭게 친구로 추가된 것 외에는 도훈의 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아니, 하나 생기긴 했다. 바로 휴대폰을 산 것이다.
 
일주일 전 쯤 도훈의 아버지는 옆구리에 상자 하나를 안고 웃는 얼굴로 귀가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휴대폰을 선물하며 말했다.
 
"요즘 애들 다 하나씩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너도 이제 여자친구도 만들 나이고 하니깐 사왔단다. 요금제도 지금 네 나이에서 쓸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큰 거니깐 마음 놓고 쓰거라."
 
도훈은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연락할 사람이 없는 걸요.'
 
이 말이 목 구멍까지 밀고 올라왔다. 그 때문인지 목이 메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씩 웃더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욕실로 향했다.
 
도훈은 온갖 기능이 첨가된 최신형 휴대폰을 한 시간 정도 조작하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휴대폰을 학교에 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것을 가져오는 순간부터 빵셔틀에 이어 알셔틀 노릇까지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마친 도훈은 현실로 돌아왔다. 어느 새 1학년 D반으로 가는 입구가 아닌 여학생들 교실이 있는 I반 쪽 입구로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계를 보니 쉬는 시간도 3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기에 도훈은 달렸다.
 
정신없이 달리던 도훈은 코너를 돌 때, 반대편을 보지 못하고 반대편에서 다가오고 있던 한 소녀와 부딪히고 말았다.
 
"앗!"
 
"꺅!"
 
도훈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안경이 날아가고, 도훈과 소녀 둘 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부딪힐 때의 충격으로 도훈은 빵과 우유를 놓치고 말았고 소녀는 미안해하며 빵과 우유를 주워 주었다.
 
"미안, 미안해. 자, 여기 빵이랑 우유. 그리고 이거."
 
소녀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던져 구석에 쳐박혀 있던 안경을 주워 도훈에게 건네 주었다.
 
"자 그럼 안녕."
 
도훈은 안경을 쓰고 소녀가 뛰어가는 쪽을 바라 보았다.
 
왠지 낯이 익었다. 하지만 뒷모습만 봐선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응? 이게 뭐지?"
 
도훈은 한 손엔 빵과 우유를 안은 채 바닥에 떨어진 노란색의 수첩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이제 2분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첩을 교복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교실을 향해 달려 갔다.

오늘도 어김없이 성호의 심부름과 희빈의 위협으로 하루를 마친 도훈은 가슴 속이 답답해져오기 시작했다.
 
빵셔틀 연합회에 가입하면 뭐든 바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답답하고 힘겹고, 또 비굴한 삶은 계속 되었고 연합회는 그저 이런 일들의 불만을 토로하는 곳에 불과했다.
 
연합회원들이 회장들에게 가지는 믿음은 마치 신앙과도 같아서 회장의 대책없는 복수론에도 박수를 치곤 했다.
 
어느 덧 저녁 8시가 되었다. 초 여름의 긴 해도 지고, 도훈은 주린 배를 감싸며 빵을 구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굽지 않았을 빵이다.
 
아니, 그보다도 한국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굽지 않았을 빵이다.
 
아버지는 자식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장래를 위해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것은 그의 아버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실수였다. 경제적 몰락과 자식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했으니.

그의 아버지를 탓할 일은 없었다.

탓할 마음도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도훈 역시 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성호와 희빈을 떠올릴 때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상하이의 외국인 학교 재학 시절을 회상했다.

그 땐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이런 세상을 몰랐었다. 모두가 각자의 모국에서 상류층의 자녀였기에 나름대로의 품위나 가식을 지키며 물리적인 충돌을 피해왔었다. 그 땐 정신적으로 피로했지만 함께 고민을 나눌 친구가 있었고 지금은 정신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힘들어도 고민을 토로할 친구가 없다.

이런 말을 빵셔틀 연합회원들 앞에서 했다간 당장 연합회에서 떠나란 소릴 듣겠지만 이 것은 도훈이 느낀 진실이었다.

빵셔틀 연합회는 그저 자신의 울분을 일시적으로 푸는 위안처일뿐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곳을 당당히 탈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도훈은 실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빵을 다 먹어치운 도훈은 방으로 들어가 엄지 발가락으로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의자를 빼내며 발견했다.

자신이 오늘 주워온 노란 수첩을.

그 것은 분명 여학생의 것이었다.

그 것은 마법과도 같았다.

수첩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튀어나와 그의 얼굴을 붙잡고 날 한 번 봐달라고, 열어봐도 된다고 끌어 당기는 것 같았다.

노란색의, 파스텔 톤의 수수한 수첩.

표지에는 낙엽진 나무 아래에 한 쌍의 소년 소녀가 손을 잡고 앉아 있는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도훈은 윈도우의 시작음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래. 아마 저기에는 그 아이의 비밀이 있을거야. 어쩌면 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친구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을 모아둔 걸지도 몰라. 그게 무엇이든 내가 봐선 안 돼. 그건 옳지 않으니까.'

도훈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한 번 쏠린 관심과 그로 인해 샘솟은 호기심은 그런 그의 시선을 거부하며 수첩 쪽으로 그의 얼굴이 돌게 만들었다.

'그래, 어차피 내가 가져갔단 것도 모를 거 아냐? 조금만 보면...... 그래, 이름이랑 얼굴만이라도......'

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수첩을 잡았다. 노란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들의 우정을 위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 보관함!'

글씨는 다소 악필이었으나 알아보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우정. 그리운 단어였다.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던 도훈은 이 수첩의 주인은 두 명의 남녀와 십여년 이상을 친구, 그 것도 보통 사이가 아닌 친 형제자매처럼 지내왔음을 알 수 있었다.

흑단같은 긴 머리에 비쩍 마른 어두운 분위기의 소년과 모든 사진이 단발 머리인 귀여운 소녀, 그리고 항상 원피스를 차려입고 공주처럼 새침한 표정을 한 또 다른 소녀 하나.

그들의 사진 아래에는 사진을 찍은 날짜로 추정되는 옛 연도가 적혀 있었다.

세 소년 소녀가 점점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던 도훈은 묘한 질투심이 일었다.

자신도 태어났을 때부터 모국에서 계속 살아왔다면 이런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문득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를 미워해선 안된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수도 있는 그의 아버지였다. 남들이 뭐라하건 그만은 아버지를 존경하고 따라야만 했다.

몇 장을 더 넘기자 어느 덧 초등학교에 들어간 세 소년 소녀가 있었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겼을 때, 그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또 한 편 떠오르는 희열에 몸을 떨었다.

단발 머리 소녀의 독사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 때까지와는 달리 연도와 함께 누군가의
 멘트가 달려 있었다.

-화난 하연이. 귀여워라.

-귀엽긴 개뿔이. 토나온다. 것보다 이 때부턴 좀 낫네. 그 전엔 남자인 내가 더 예뻤었는데.

그 다음 사진은 모두 단발 머리 소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 사진을 찍은 연도와 함께 멘트가 두 개씩 달려 있었는데 각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왠지 남자의 말투나 어릴 적 분위기가 그가 아는 누군가와 닮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는 그 것에 대한 생각은 우선 접고 키보드를 밀어 넣은 채 머리를 쥐어 뜯었다.

이 수첩의 주인.

그녀는 다름아닌 그의 짝사랑 상대인 하연이었던 것이다.

수첩은 그녀에게 상당히 중요한 물건일 것이다.

비록 오래되어 종이가 너덜너덜 하지만 표지의 노란 빛깔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 그 것을 증명했다.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순간 그의 눈에 띈 것은 쓰질 않고 방치해 둔 자신의 휴대폰이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용기가 치솟았다.

도훈은 수첩의 맨 앞과 뒤를 뒤적였다.

그의 생각대로 그 곳에는 수첩의 주인인 '이하연'의 프로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이하연. 나이는 현재 열일곱. 생일은 7월 29일. 그리고 전화번호는......

그녀의 휴대폰 번호를 확인한 도훈은 그의 휴대폰을 들고 그 번호를 눌렀다.

각종 광고나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타인과 나누는 첫 통화였다.

그리고 그 상대가 짝 사랑하는 소녀다.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인가 번호를 틀리고, 틀린 번호를 다시 고쳐가며 그는 결국 하연의 번호를 완성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면 이제 신호가 갈 것이고 저 어딘가에서 하연이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예의가 없다고 욕해도 뭐라 대꾸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 그의 머릿 속을 스쳐 지나 가는 것은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온 초대 회장 박진헌의 연설 중 일부였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물리적인 힘이나 지식이 아닌 마음가짐이다.
 
우리는 항상 그 후의 일을 걱정하기에 주춤하고 그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
 
그 날 부딪힌 것으로 마지막이었을 인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그 인연의 끈을 더 늘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도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통화 연결음 후 고대하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모르는 번호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 것이다.
 
"여보세요?"
 
도훈은 심호흡을 두어번 하고 답했다.
 
"여보세요? 거기 이하연 씨 휴대폰 번호인가요? 저, 저는 권도훈이라고 하는데요. 혹시 낮에 수첩......"
 
"자, 잠시만요! 언니! 언니!"
 
갑작스런 상대방의 외침에 도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상대방은 하연이 아닌 것 같았다.
 
"왜 그래! 상연아!"
 
"언니, 찾았어! 언니 수첩! 빨리 가서 전화 받아봐!"
 
"뭐? 아, 응!"
 
잠깐 긴박한 발소리가 오가고 그 것을 멍하니 듣던 도훈의 귓가에 드디어 진짜 이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내 수첩 어딨어요? 언제 주웠죠?"
 
그 수첩이 생각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하연은 다급한 목소리로 네 개의 질문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아, 저는 권도훈이라고 하구요. 수첩은 지금 저한테...... 그리고 낮에 부딪히면서 떨어뜨리신 것 같은데...... 미안해요. 그 때 바로 돌려줬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혹시 봤어요?"
 
"예?"
 
"아, 아니에요. 지금 어디에요? 학교 앞으로 나올 수 있나요?"
 
"네? 학교 앞이요? 예. 갈 수 있어요."
 
도훈은 모니터 오른쪽 하단 구석에 위치한 시계를 보았다. 오후 8시 30분이었다.
 
"그럼 9시에 교문 앞에서 봐요! 그럼!"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도훈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드디어 만난다.
 
만나서 무슨 얘길 들을지 모르지만 일단 만난다.
 
지금은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외 다른 일은 중요치 않다.
 
도훈은 땀이 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씻었다. 속옷을 갈아 입고, 은은한 향이 나는 향수까지 뿌린 도훈은 현재 소지하고 있는 옷들 중 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수첩을 들고 학교로 달려갔다.
 
그녀는 9시에 나온다고 했다. 처음으로 바깥 외출을 한 휴대폰을 드니 아직 8시 50분이었다.
 
10분. 10분만 기다리면 그녀가 온다. 그 때, 도훈은 어렴풋이 불안감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왠지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도훈은 재빨리 교문 옆 담장에 몸을 숨겼다.
 
부아아아앙
 
요란한 엔진음과 함께 오토바이가 한 대 다가왔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보니 성호와 무척 친한 C반의 학생이었다.
 
도훈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하연을 만난다는 기대감은 사라지고 왜 나왔을까 하는 후회감과 함께 공포심과 분노가 마음을 반 씩 차지했다.
 
휴대폰 폴더를 연 도훈은 하는 일 없이 문자를 보내는 척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밤 9시 55분.

기다리던 그녀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그 쪽 맞죠? 제 수첩을 가지고 있다는게."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냉막했다. 도훈은 이미 각오한 바였지만 가슴 속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네...... 안녕하세요. 권도훈이라고 합니다. 여기."

도훈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노란 수첩을 건네자 하연은 가로채듯 그것을 받았다. 잠시 도훈을 노려보던 하연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봤어요? 안 봤다곤 말 못 하겠죠? 얼마나 봤어요?!"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도 더 격렬했기에 그 순간 도훈은 성호에게 당하던 때보다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말대로 안 봤다고는 말 못 한다. 봤으니까 연락처도 알게 된 거니까. 때문에 도훈은 모든 것을 감수하기로 했다.

"네. 봤어요. 하지만 전부 다 보진 않았어요. 정말입니다. 제가 본 것은 그 쪽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미안해요."

도훈이 정말 울먹이며 사과를 하자 이제 다급해진 쪽은 하연이었다. 사실 그녀의 입장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화낼 입장이 되지 않는다. 우선 수첩을 잃어 버린 것은 그녀 스스로의 부주의 때문이고 도훈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돌려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잃어 버린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얼굴이 팔릴 것은 각오하던 바였기에 오히려 이 시간에 부른다고 재깍 나와준 도훈에게 고마워 해야 정상이었다.

"미, 미안해요. 사실 이해해요. 그러니까 그렇게 미안해 하지 말아요. 이 시간에 부른 제가 더 미안하고 고맙죠."

그 말에 도훈은 살짝 안도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정말 천사같은 마음을 지닌 것이 분명했다.

"근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하연이 살짝 웃으며 물었다. 도훈은 뭐라 답해야 할지 허둥대다가 결국 그의 머릿 속을 떠다니던 생각을 말해버렸다.

"네. 본 적 있어요. 제가 처음 전학온 날 전 매점을 향해 뛰었고 그 쪽이 제게 매점 위치를 가르쳐 주었죠."

본인만의 추억을 얘기해버린 도훈은 마음 속으로 반 정도 후회했다. 혹시 하연이 자신을 기억 못 한다면 어떨까? 분명 자신만의 추억임을 알면서도 절망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변을 내놓았다.

"아! 그 때 그 전학생! 근데 몇 학년이세요? 전 1학년 K반 이하연이라구 하는데!"

도훈은 안도했다. 그녀는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1학년 D반 권도훈이에요. 기억하고 있었네요."

"1학년? 그랬군요. 아니 그랬구나. 말 놓을게. D반이면 재현이......가 있는 곳, 맞지?"

도훈의 가슴이 순간 철렁하고 내려 앉았다. 하연은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늘의 달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분명 수심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둘의 사이가 의심스러웠다. 헤어진 연인인가 아니면 하연의 짝사랑인가? 고백은 했을까? 사귀었다면 어디까지 갔을까?

본능이 물으라고 시켰지만 또 다른 본능은 위험하다 외쳤다. 그리고 도훈의 이성은 후자의 의견을 수렴했다. 화제 전환의 필요성을 느낀 도훈은 애써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 근데 내가 매점 물어 봤던 건 어떻게 기억해요?"

그제서야 하연의 얼굴에서 수심이 사라졌다.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온 하연은 반달 눈으로 도훈을 이리저리 훑어 보더니 말했다.

"에이. 뭘 존댓말을 쓰고 그래. 말 놔. 어떻게 기억하냐구? 음...... 그야 당연히 촌스러우니까!"

촌스러우니까. 그 말에 도훈은 반 쯤 넋이 나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나름 차려 입었단 모습이 겨우 목이 늘어나기 직전인 흰 반팔 티셔츠에 그냥 파랗기만 한 청바지였다.

그에 비해 하연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유행을 타지 않는 단색 계열의 옷차림을 적절히 입어 그 자신만의 매력을 뽐냈다.
 
그제서야 도훈은 자신과 하연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눈으로 확인하니 더욱 비참해졌다. 하연은 학교의 아이돌. 자신은 빵셔틀이다.
 
"그런 것 같네."
 
인정하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풋! 장난이야! 장난! 그게 아니고...... 음...... 그냥 내가 좀 기억력이 좋아. 전학생! 이름이 권도훈이랬지? 1학년 D반이고. 우린 이제 친구야, 그치? 잘 지내보자."

하연은 미소를 띈 얼굴로 도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한 것이다.

도훈은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그 손을 잡으려다 멈칫했다. 자신의 손은 땀범벅이었던 것이다.

"뭐야, 악수 안 해? 무안하게......"

하연은 투덜대며 손을 빼려했다. 바로 그 때 티셔츠에 땀을 닦은 도훈이 그 손을 잡았다.

"응! 자, 잘 지내보자."

도훈은 왠지 앞으로의 학교 생활이 한결 나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연은 멍하니 서있는 도훈의 어깨를 툭치더니 학교 앞 편의점을 가리켰다.

"가서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자. 늦은 시간에 불러서 미안해. 그러니까 내가 살게."

"아, 응."

편의점에 들어간 도훈과 하연은 그들에 취향대로 각각 메론 맛과 딸기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계산을 하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도훈은 한 달 전 쯤 형진과 편의점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분명 종이 같은 '사람'과 왔는데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고마워."

아이스크림을 건네 받은 도훈은 포장을 뜯고 겉면을 조금 핥았다.

고개를 돌려 하연을 보니 그녀는 이가 꽤나 튼튼한지 단단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입 안에서 오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이던 나머지 도훈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하연은 민망한듯 고개를 돌렸고 둘은 말없이 서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제 난 가볼게. 그럼."

하연은 그에게 손을 흔들고 편의점 아랫길로 걸어갔다.

"아! 잠깐! 같이가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도훈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공교롭게도 집 방향이 같았던 것이다.

"너 집 이 근처야?"

하연이 물었다.

"응."

"와, 신기하다. 어떻게 한 번도 못 봤지?"

"그러게."

도훈은 고개를 살짝 틀어 달을 보는 척하며 웃었다.

오늘은 유난히 성호가 일을 더 시키더라니. 이런 뜻하지 않은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일까?

만약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소녀와 잘 된다면, 희빈을 치아를 교정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십여분을 걷자 둘의 집이 나왔다.

정말 우연이었다.

둘의 집은 겨우 몇 십 미터 거리였다.

둘은 서로를 바라 보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학교에서 봐! 늦게 불러내서 미안했어!"

"응. 잘 가."

도훈은 여전히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 같았으면 다시 한 번 엄습해오는 처절한 외로움에 몸서리 쳤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가슴 속 한 구석이 따뜻했다.

두근거렸다. 그녀와 악수한 손을 경이롭게 보던 도훈은 그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곤 펄쩍이며 뛰었다.

그 때 위이잉거리는 휴대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하연이었다.

<찾아줘서 고마웠고 화내서 미안해. 내일 보자! -하연>

도훈은 미소지으며 답장을 했다. 그가 휴대폰을 산 이래 처음으로 보내는 문자 메시지였다.

<아냐. 나야말로 아이스크림 고마웠어. 내일 보자.>

그리고 그는 아주 오랜만에 걱정없이 잠이 들었다.

 

ㅇ

댓글 0

올린 파일 /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첫 댓글은 글쓴이에게 가장 반가운 알림이에요

      문학 게시판

      글 368개 · 1/19쪽

      목록으로
      0추천

      시초겨울

      0추천

      실연독백22

      0추천

      실연독백1

      0추천

      기타코난도일

      0추천

      소설The Bitch 6

      +1
      0추천

      퍼온 문학김소월 3

      0추천

      퍼온 문학김소월 2

      0추천

      퍼온 문학진달래꽃

      0추천

      퍼온 문학박인희

      0추천

      퍼온 문학목마와숙녀

      0추천

      시풍경달다

      0추천

      시눈송이처럼

      0추천

      기타오랜만에 투니버스에서 검정고무신 틀어주네요2

      0추천

      소설The Bitch 5

      0추천

      소설The Bitch 4

      0추천

      소설The Bitch 3

      +1
      0추천

      소설The Bitch 2

      +1
      0추천

      소설The Bitch 1

      +1
      0추천

      소설본격 리얼리티 밑바닥 소설 The Bitch

      0추천

      시레미 드 구르몽-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