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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때 반년정도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한살 연상의 미대생이었다.

아르바이트 하다가 알게된 사람이었는데 언뜻 보기에는 그냥 지극히 평범한 여대생이다.

그러나 그녀가 그리는 그림은 그렇지가 않았다.

전위적이라고 해야할까.

나는 그림같은 것에 정통하지 않아서 전위적이라는 표현이 맞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의 그림은 하나같이 [몸의 어느 한 일부가 거대한 사람] 이었다.

그룹 전시회에 출품했던 작품도 그랬고 그녀가 보여준 스케치북에 가득 담겨있던 그림도 그랬다.

예를 들어보자면 그녀가 반라의 외국인이 정면을 응시하는 그림을 그린적이 있다.

그 그림 속 외국인은 왼쪽 눈이 비대하게 커서 얼굴 반 이상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얼굴 바깥까지 튀어나와있었다.

발가락만 거대한 사람을 그린 적도 있다.

코, 입, 어깨, 엄지 손가락 등 부위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녀의 화풍은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추상적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그림을 보면 구역질이 날때가 많았다.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면 그녀는 언제나 곤란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녀와 사귀고 난 후로 한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어릴적부터 몇번이고 반복해서 꾸던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악몽이라고 구분지어야 하는 것일까.

그 꿈은 흔히 있는 쫓기고 도망다니는 위협적인 꿈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정적이던 그 꿈은 언제나 기습적으로 찾아왔다.

 

 

자루 같은 것이 등장한다.

흡사 염낭과도 같이 아리따운 문양의 커다란 주머니.

하지만 어린 아이정도는 들어가 숨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내가 어떤 꿈을 꾸던 중이었건 상관없이 그 꿈은 찾아온다.

갑자기 정신이 들고보면 옛날에 살던 아파트에 내가 서있다.

창가에서 저녁노을이 쏟아지는 방 안에 그 주머니는 내 앞에 놓여져 있다.

나는 이 꿈이 참으로 무서웠다.

 

꿈이란 본디 제멋대로 눈앞이 핑핑 돌도록 어지럽게 바뀌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이 방에 서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공기가 얼어붙은 듯 멈추어버린다.

 

꿈 속의 방에는 문이 없다.

나는 단지 우두커니 서서 그 자루를 바라본다.

보고싶지 않은데 홀린 듯 눈을 뗄수가 없다.

아주 근소하게 열려있는 자루의 입구를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바라보고 만다.

 

안돼. 어서. 어서 꿈에서 깨야해.

도망칠수 있는 길은 그뿐이다.

그 방에는 언제나 석양이 드리우고 있다.

석양이 점차 어두워지면 자루의 입구가 열릴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대략 이런 꿈이다.

꿈에서 깨고나면 언제나 강렬히 생각한다.

이제 다시는 그 방에 가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 어떤 즐거운 꿈을 꾸는 도중이라도 문을 열면 그 방으로 이어지고 만다.

소스라쳐 그 방에서 나오려 뒤를 돌아보면, 문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빈도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그 꿈을 대학 입학 직전까지도 꿨었다.

 

차근차근 생각해봐도 그 자루를 본 기억은 없었다.

오래전 살던 그 아파트, 다다미 깔린 내 방은 이미 철거되고 없어졌다.

그 곳이 등장하는 이유와 맥락을 알 수가 없다.

그렇기때문에 더욱 두려움이 생겼다.

부모님께도 그 누구에게도 차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허나 여자친구와 사귀기 시작하고부터는 이 꿈을 단 한번도 꾼 일이 없다.

안심하는 마음 한켠에, 오랫동안 멈추지 않던 딸국질이 멈춘 것 같은 기묘함이 느껴졌다.

 

여자친구에게 이 일을 한번 상담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한밤중에 미술대 건물에 몰래 들어가볼까?"

미술대 건물은 밤에는 문단속이 단단히 되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비밀리에 잠입할 수 있는 루트가 알려져 있었다.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미술대 건물에 잠입하기로 했다.

 

약간의 불빛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밤.

여자친구와 미술대 건물로 갔다.

그녀는 슥슥 벽을 기어올라 열려있는 창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의 뒷문이 열렸다.

나는 미술대 건물에 와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건물 안에는 상상 이상으로 여러가지 물건들이 번잡하게 굴러다니고 있어서 나도모르게 그만 감상을 내뱉었다.

 

"더럽기도 하지."

 

가지고 온 손전등으로 여기저기 비추며 그리다만 그림, 목공품같은 학생들의 작품 속을 가르듯 헤치고 복도를 누비며 계단을 올라 3층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내가 작품을 두는 곳이야."

 

분명 어디서 본 것같은 화풍의 그림이 빽빽히 놓여있었다.

늦은 밤에 이런 식으로 흐릿한 빛줄기 아래서 보려니 정말 이루 말할수 없이 소름이 끼쳤다.

 

 

 

 

 

 

 

 

 

"전부터 묻고싶었는데 어째서 이런식으로 딱 한 부분만 비대한 사람을 그리는거야?"

 

분위기 탓이었을까 나는 여자친구에게 지금까지 차마 묻지 못했던 그 질문을 던졌다.

여자친구는 오른쪽 눈이 기괴하게 커다란 사람의 그림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대답했다.

 

"내가 어렸을때 말이야. 가족들이랑 남쪽 섬에 간적이 있었어. 폴리네시아 쪽. 그 곳 민화 중에 이런게 있었어. 옛날에 인간이 지금보다 더 거대하고 거만했던 시절, 인간의 태도에 화가 난 정령이 저주를 걸어서 사람들의 몸을 작게 만들어버렸어. 하지만 인정이라도 베푼 것인지 몸의 한 부분에만은 저주를 걸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 사람들은 점점 거대한 손이나 귀, 코가 징그럽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지. 그래서 정령에게 빌었어. 나머지 몸도 작아지도록 저주를 걸어주세요, 라고."

나는 무심결에 그림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건 저주에 걸려 작아진 거인들이야. 이 남자는 커다란 오른쪽 눈으로써만 진실된 세상을 볼수가 있어.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기에 그 눈은 오히려 짐이 되었지. 그래서 인간들은 스스로 어리석고 왜소한 생물이 되기를 선택했다는 그런 민화였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희미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나 말이야. 안믿어줄지도 모르지만 정말로 봤어. 그 섬의 한구석에서. 그 그림처럼 생긴 사람. 가족들 중에 나만 봤어. 일본에 돌아오고 나서도 봤어. 우리 주변에 있더라고. 더이상 이런거 안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눈에는 계속 보였어.

게게게의 키타로(ゲゲゲの鬼太郎) 라고 알아? 거기 나와.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을 퇴치하는 방법말야. 귀신에 씌인 사람이 질문을 하면서 돌에 표시된 점선을 이으면 그 귀신의 정체가 드러나서 돌에 갇히고 만대. 초등학교때 읽었어. 그래서 나도 그렸어. 이런 그림들.

그랬더니 안보이더라고. 몸의 일부만 거대한 사람들이 말야. 하지만 그때부터 여러 불가사의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어. 어쨌거나 난 그딴 것들 보고싶지 않았는데.

근데 있잖아. 이거 꼭 그 민화 내용같지 않아? 평범한 생활을 하고싶어서 진실일지도 모르는 힘을 버리는게 말이야. 더 이상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전부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 이제는 보고도 못본척 할 뿐이야.

그래도 신체의 일부가 큰 사람들을 계속 그리는건...... 그냥 정말로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러고 보니 그녀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백인 아니면 일본인 뿐이었다.

 

"바보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해?"

그녀는 평상시처럼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확실히 믿을수 없는 이야기다.

황당무계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녀가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내 눈에 들어온 그림이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 있는 선반에 꽂혀있는 그림들 중 가장 안쪽에 있던 그림.

그 그림에는 항상 내 꿈에 나오던 그 자루가 그려져 있었다.

비비스케 http://vivian912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