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훈은 눈을 떴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5시 30분이었다.
알람은 오전 7시에 맞춰 놓았는데 무려 한시간 반이나 일찍 일어난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을까.
한참을 생각해봤지만 결국 자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눈만 깜빡이던 도훈은 전학오고 나서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간사한 눈빛을 보이던 희빈, 폭력적인 성호, 그 외에도 그다지 호감이 보이지 않는 눈빛을 보여주던 친구들.
그리고 처음 매점으로 향하며 본 소녀, 하연.
'저기, 혹시 전학오셨어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그녀는 그렇게 물었다.
그는 지쳐 있었다. 어느 정도 순응하는 법을 배웠지만 도훈은 만족하지 못했다.
완전한 자유를 원했다.
비록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그리고 그녀가 곁에 있다면 이 노예같은 생활도 잘 버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도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친구가 많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친구들 사이에 있었고, 가끔 빵을 사러 나갈 때, 스쳐가며 볼 때마다 그녀는 늘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멀쩡한 '여자 사람' 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일찍 일어나 할 일도 없고 그 역시 평범한 학생이었기에 공부하기는 싫었기에 그는 컴퓨터를 켜고 아무도 등록되어있지 않은 메신저를 습관적으로 접속했다.
"어라? 이게 뭐지......"
컴컴한 방 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니터의 푸른 빛뿐, 그 푸른 빛을 얼굴 가득히 받으며, 도훈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메신저에 있는 쪽지창을 열었다.
"당신을...... 초대합니다?"
놀랍게도 그 곳에는 쪽지가 도착해 있었다.
쪽지의 발신자는 윤형진이었다.
"윤형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락고에 전학온 뒤로 1학년 D반 밖으로 나간 일이라고는 체육 시간과 매점갈 때 뿐이었기 때문이다.
띠링
그가 막 쪽지를 읽으려던 찰나 모니터의 오른쪽 하단에 대화 신청 메시지와 함께 효과음이 들려왔다. 도훈은 마우스를 천천히 그 대화 신청 메세지에 갖다 대고 클릭했다.
상대는 윤형진이었다.
그가 말했다.
-안녕? 얼마 전 1학년 D반에 전학온 권도훈 맞지?
도훈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그래. 너는? 우리 반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어딜 초대한단 거야?
상대는 잠시 웃는 듯한 소리를 입력하더니 자신에 대해 차례대로 알려 주었다.
-맞아. 나는 윤형진. 너랑 같은 1학년이고. 나는 G반이야. 널 초대하는 곳은...... 바로 우리 빵셔틀들의 아지트지.
'빵셔틀들의 아지트?'
도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건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또다른 수작이 아닐까?
혹은 이대로 원양어선에 팔려가는 것은 아닐까?
그가 고민하는 사이에 형진은 재빨리 타자를 쳤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우리들, 빵셔틀들은 그 어떤 합당한 이유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왔어. 그런 현상을 탈피하기 위해 만들어진거야. 우리 빵셔틀 연합회가.
-빵셔틀 연합회?
-응. 거기 쪽지 읽어봐.
도훈은 재빨리 알트 버튼과 탭 버튼을 눌러 쪽지를 읽었다.
"억울한 그대들이여, 뭉쳐라. 뭉치면 살지만 흩어지면 죽는다. 함께 자유를 쟁취하자. 비록 지금은 빵셔틀이지만 일년 뒤에는 우리들이 학교를 지배한다?"
야심차고도 왠지 유치한 멘트 아래에는 빵셔틀 연합회의 홈페이지 주소가 적혀 있었다.
-링크를 눌러봐.
도훈은 형진의 말을 따라 링크를 눌렀다. 그러자 '대한민국 빵셔틀 연합회' 라 적힌 메인 화면이 떴다.
그 다음 그 로고를 누르자 패스워드를 입력하라는 창이 떴다.
-정식 패스워드는 네가 우리 집회에 오겠다고 결정하면 알려주겠어. 우선은 0dori를 입력해. 그게 방문자 용 임시 패스워드니까.
시키는대로 입력을 하니 후줄근한 열 글자만 적혀 있던 메인은 사라지고 다양한 탭과 게시판, 그리고 사진들이 떴다.
-대부분의 탭과 게시판들은 사용이 불가능할거야. 사진들 역시 우리가 노리고 있는 일진 녀석들의 사진만 열람 가능할거고. 만약 네가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말한다면 넌 우리들의 정식 회원이 되어 모든 것을 즐길 수 있어. 1년 후 우리와 함게 학교를 제패하는거지.
두근거렸다. 이런 역전의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이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은 왠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줘.
-그래. 일주일 주지. 그동안 결정하고 쪽지줘. 친구 추가 해놓고. 그럼 안녕. 학교에서 보자.
형진은 로그아웃을 했고 도훈 역시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욕실로 향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도훈은 생각했다.
이 것은 기회가 아닐까? 아무 이유없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그들에게 복수를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혼자였고 상대는 많았다.
당장 그를 노골적으로 적대하는 성호와 희빈만 하더라도 둘이다.
그에 비해 자신은 혼자.
게다가 말을 걸어오는 친구도 없어 전학온 이래 학교에서 하는 식사는 늘 혼자였다.
그는 외로웠다.
하지만 또 그 때문에 쉽게 결정짓지 못했다.
배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상호 작용없이 그 혼자서 일방적으로 믿은 경우긴 하지만 그는 이미 한 번 배신을 경험했었다.
바로 희빈에게서 였다.
한참동안 물줄기를 맞으며 며칠 전의 끔찍한 기억들을 회상한 도훈은 몸을 닦고 욕실을 나섰다.
조금은 이르지만 교복을 입은 도훈은 부엌으로 가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아침은 버터를 두른 프라이팬에 식빵 두 조각을 굽고 딸기 잼을 바른 간단한 토스트였다.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지만 중국에서 조선족 가정부를 두고 살던 도훈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도훈은 냉장고에 있던 우유를 벌컥이며 식사를 마쳤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야근을 하신 듯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훈은 점점 소외되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는 물론 가정에서도 그는 외톨이다.
그 누구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여섯시 반이었다.
학교는 여덟시까지니 아직 한 시간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도훈은 다시 메신저에 접속했다.
그는 외로웠다.
누구라도 좋으니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그는 찾았다.
여전히 접속해 있는 윤형진을.
-너 혹시 바쁘니?
도훈은 떨리는 손으로 타자를 쳤다. 다행히 곧 답신이 왔다.
-아니. 한가해. 왜? 벌써 결정한거야? 우리와 함께 하겠어?
도훈의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그렇다고 말하면 자신은 더 이상 외로움을 겪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는 망설였다. 아직 좀 더 윤형진이라는 인물을 알고 싶었다.
-이 학교에 대해서 알려줘. 우리와 같은 빵셔틀들은 누가 있고 또 조심해야할 일진 녀석들은? 또 선생님들은 그런걸 왜 묵인
하는건지도!
꽤나 고민해서 던진 질문이었지만 답은 금방 입력되었다.
-하하하하 그런게 궁금해? 음, 우선 우리 빵셔틀들은...... 말해줄 수 없어. 하지만 우리 연합회에 들어온다면 알려주지. 하지만 몇 주 뒤면 알게 될거야. 이 짓 오래하다보면 '사람보는 눈' 이 생기거든. 또 조심해야 할 일진? 그런건 없어. 모두가 위험한 놈들이야. 너희 반의 성호가 오히려 착한 축이지. 선생들이 묵인하는 이유야 당연히 귀찮거나 학교 명예에 누가 되기 때문 아니겠어?
도훈은 그의 대답에 실망하며 다시 무언가를 묻기 위해 타자를 쳤다. 바로 그 때 형진의 새로운 글이 입력되었다.
-난 그런 것보다 네가 다른 걸 궁금해 할 줄 알았어. 이를테면 예쁜 여자애 같은......
도훈의 심장이 순간 크게 두근거렸다. 형진은 마치 도훈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본 듯 그가 궁금한 내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너도 봤다시피 사락고는 그리 물이 좋지 않아. 남자든 여자든 말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예외는 있지. 잠시만 있어봐. 정리해둔 파일을 보내줄게.
형진이 보내준 자료에는 세 명의 소녀와 두 명의 소년이 있었다.
세 명의 소녀는 이하연, 최은하, 채정아였고 두 명의 소년은 김재현과 박민환이었다.
이 중 이하연과는 전학 온 첫 날 매점 가다가 마주 쳤었고 김재현은 놀랍게도 같은 반이었다.
도훈도 이제서야 자신을 향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소년의 이름이 재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데이터에 대한 불신감이 치솟았다.
유일하게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급우를 위험 인물로 분류해놓았기 때문이다.
김재현 외에도 위험 인물에는 채정아와 박민환이 있었는데 박민환의 경우 '먼저 건들지만 않으면 된다.' 라고 적혀 있었다.
도훈이 가졌던 불신감은 이하연의 차례에 와서 깨끗이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이하연을 착하고 예쁘다고 평가해놓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다섯의 얼굴과 이름, 그 외의 데이터를 암기한 도훈은 학교로 향했다.
머릿 속에는 오늘 친구를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
학교는 집에서 십 분 거리였기에 그는 느긋하게 나섰다.
등굣길에는 같은 반 학생들도 보였지만 그 누구도 도훈에게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 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손을 크게 흔들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얌마! 같이 가자!"
그가 가까이 왔을 때 도훈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재현이었다.
도훈은 그에게 인사를 할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처럼 인기 많은 학생이 자신 같은 빵셔틀에게 관심을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뒤에 있던 같은 반 학생들은 도훈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친밀한 모습을 뒤로 한 채, 도훈은 부러움을 가슴 속 깊이 숨긴 채 터벅터벅 학교를 향해 걸었다.
1교시. 성호가 아직 학교에 오지 않았기에 아직은 그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희빈도 성호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이런 것을 보면 희빈은 정말 비열한 인간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호가 무섭다기 보다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것 같았지만 희빈 본인은 자신의 권세가 성호와 다른 일진들의 바로 다음이라고 생각하는 듯 거들먹거렸다.
학급 내에서도 눈치 빠른 몇몇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심지어는 성호마저도 희빈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몇몇 눈치가 느린 녀석들, 이를테면 도훈 같은 아이들은 아직 눈치를 못 채고 희빈의 안색을 살필 뿐이었다.
도훈은 책 사이에 머리를 박고 잠이 든 체 했다. 성호가 올 때까지, 아니 최소한 성호가 도착한 뒤 매점 심부름을 시키기 전까진 이러고 있으면 자유다. 도훈이 찾아낸 하나의 도피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형진이 말했던 위험 인물 재현과 그의 친구들이었다.
"......"
"뭘 보냐?"
재현이 말없이 도훈을 응시하고 있자 장호가 물었다.
"저 새끼말야. 사실 별 잘 못 없지 않냐? 중국에서 왔다며. 그럼 뭐 빵셔틀 이런 거 모를 수도 있지. 안 그래?"
"그렇지. 그래서 뭐, 놀아 주자고?"
재현은 장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안해. 봉사활동 시간이라도 주면 몰라도. 그냥...... 저 옆에 앉아 있는 이빨 큰 녀석이 역겨워서."
장호는 '이빨 큰 녀석' 이 뜻하는 바를 잠시 떠올리더니 웃었다.
"그렇지. 뭐 근데 새삼스럽게...... 그럼 한 번 조져 보던가."
"그건 싫어. 시간 낭비란 말야. 그거 말고 난 더 좋은 생각이 있거든."
장호는 아무 말없이 재현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이 악랄한 급우는 항상 저렇게 순진한 얼굴로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을 파멸시켜 왔다. 물론 그 대부분이 전교생들이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 녀석이라 지금까지 이미지에 큰 타격은 없지만, 언젠가는 이 것도 꼬투리 잡힐 일이었다.
하지만 장호을 비롯한 재현의 친구들은 그에 대해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아닌 척 하지만 그와 그 친구들 역시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성호가 도착한 것은 2교시가 끝날 때 즈음이었다.
풀어헤친 셔츠에 머리는 왁스를 발라 삐죽했고 드러난 귀에는 귀걸이가 걸려있고 피어싱을 했다. 그리고 오다가 담배를 폈는지 온 몸에서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성호야!"
희빈은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성호를 맞이했다. 성호는 귀찮음이 반 쯤 배인 얼굴로 조용히 가방을 벗어 희빈에게 맡겼다.
"으음...... 앉거라."
국사 선생은 늦은 것에나 교칙을 어긴 것에 대해 아무 말하지 않고 그를 앉혔다.
성호는 자리에 앉더니 책을 펼 생각도 않고 지갑을 뒤적여 천원을 꺼냈다. 그리고 옆자리의 준형을 툭툭 치더니 천원을 건네며 턱으로 도훈을 가리켰다.
"'쉬는시간' 이랑 딸기 우유."
이번에는 고기시대의 후속 시리즈인 쉬는시간과 딸기 우유를 사오라는 소리였다.
도훈은 애써 못 들은 척 하려 했지만 희빈은 그의 옆구리를 거세게 찔러 그를 일으킨 뒤 그 천원을 받아 건넸다.
"쉬는시간이랑 딸기 우유야. 들었지? 늦으면 죽어!"
주먹을 쥐락 펴락하며 웃어 보이는 희빈의 얼굴을 순간 확 갈겨 버리고 싶었던 도훈이지만 금새 단념했다. 희빈과 싸워 이길 자신은 충분했지만 그 이후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이다.
수업 종료를 마치는 종이 치자 마자 도훈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급우들은 등 뒤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도훈은 새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며 매점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를 재현이 웃으며 조용히 따라갔다.
2교시 종료 후의 매점은 늘 바쁘다.
아침을 거른 학생은 물론 거르지 않은 학생들 역시 슬슬 배가 고파오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1교시 마치자마자 매점에 올 경우 4교시 종료 후 시작되는 점심 시간까지 3시간을 버텨야 하고, 3교시 마치자마자 매점에 올 경우엔 한시간만 기다리면 점심 시간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사이에 있는 2교시에 매점을 찾았다.
이 때 4층에 있는 1학년 교실에서 매점까지의 동선은 가장 길기에 1학년들은 대부분 3교시가 시작할 때 쯤이 되어서야 겨우 원하던 음식을 사 교실로 들어가는 실정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달랐다.
아니, 도훈을 비롯한 대부분의 빵셔틀들은 달랐다.
한 시라도 배달에 늦으면 신체에 위해가 가해지기에 누구보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1층과 2층에 교실이 위치한 몇몇 3학년들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매점에 도착했다.
매점에 도착한 도훈은 백오십원을 자신의 주머니에서 빼 총 천백오십원을 지불하고 600원짜리 쉬는시간과 550원짜리 딸기 우유를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물건은 다 샀냐?"
어디선가 불쑥 튀어 나온 손이 어깨를 툭 치자 도훈은 깜짝 놀라 그만 빵과 우유를 떨어 뜨릴 뻔했다.
"아...... 깜짝이야. 너, 너구나."
손의 주인은 재현이었다. 재현은 생글거리며 그의 손에 들린 빵과 우유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에도 성호가 시킨거냐? 음, 맛있겠다. 근데 고기 든 빵에 딸기 우유면 조합이 별론데."
"......"
도훈은 재현의 생각을 몰랐기에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쉬는 시간이 이제 5분정도 밖에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만, 얘기 좀 해."
재현은 그의 어깨에 매달려 떼를 썼다. 도훈은 그제서야 재현의 키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제까지는 그가 자신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했을까?
그것은 그의 심리가 그만큼 위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재현의 키는 그의 눈높이에도 못 미칠 정도 였지만 그의 당당하고 거리낌없는 태도가 그를 커보이게 한 것이다.
"무, 무슨 얘기! 나 바빠! 가야해!"
"아, 좀! 이 빵돌이 자식아!"
재현은 자신을 뿌리치려는 도훈의 옆구리에 살짝 주먹을 꽂았다. 무방비 상태에서 한 대 얻어맞은 도훈은 신음을 흘리며 재현을 확 밀쳤다.
밀쳐져 떨어져 나간 재현은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 쳐박혀 있었다. 도훈은 그제서야 자신이 좀 심했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밀어 그를 부축했다.
"미,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재현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더니 그의 정강이에 로우킥을 날렸다. 사실 발차기라고도 보기 안타까운 약한 발차기였다.
"괜찮아. 이정도로 봐줄게."
재현은 씨익 웃으며 도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야, 너 힘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이빨 녀석에게 당하고 사냐?"
"응? 이빨 녀석이라니......?"
도훈은 이제 재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기 시작했다. 재현의 거리낌 없는 태도에 저도 모르게 감화된 것이었다.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지저분한 놈 말야. 장희빈."
"아...... 걔?"
"그래. 임마. 왜 그딴 놈한테 당하고 살아."
"그, 글쎄......"
10초 정도 걷던 도훈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 성호가 무서워서......"
"뭐? 하하하하하핫!"
"뭐가 웃기......! 냐......"
순간 발끈했던 도훈은 그제서야 자신의 말이 충분히 비웃음을 살만큼 비굴했음을 깨달았다.
"성호가 무서워? 흠, 글쎄. 무섭긴 하지만 그 이빨 큰 외계인 새끼를 팬 것 가지곤 별 말 안 할걸?"
"응......?"
"우리 반 대부분이 그 새낄 싫어해. 그냥 확 패버려."
재현은 그의 귀를 살짝 당기고는 속삭였다.
"그 새낄 빵셔틀로 만들어 버리라고."
재현은 그 말만 남기고 손을 흔들더니 그의 앞에 가던 소녀들에게 달려가 '한 입만' 을 연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도훈은 멍하니 서서 그가 한 말을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 새낄 패버려? 빵셔틀로 만들어 버리라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잠깐동안 공상을 하며 희열에 잠겼다.
1학년 D반으로 들어간 도훈은 성호가 어디있는지 살폈다.
성호는 반 뒷편에서 희빈의 이빨을 장갑 낀 손으로 툭툭 치며 놀고 있었다.
괴로워하면서도 성호의 심기를 거스를까 빠져나오지 못하는 희빈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도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도훈은 성호가 있는 곳으로 가 빵과 우유를 내밀었다.
"여기."
성호는 약간 달라진 도훈의 태도에 멈칫하더니 조용히 빵과 우유를 받았다.
"빨리 왔네."
"......"
"한 입 먹어라."
놀라운 일이었다. 성호가 첫 한 입을 양보하다니.
이 것은 큰 변화였다. 마지막 한 입과는 다른 첫 한 입. 그 것은 도훈이 먹을 수 있는 양을 스스로 정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다.
성호가 포장을 뜯자 닭의 눈알 같은 찌꺼기로 만든 고기의 냄새가 퍼지며 입에 군침이 돌았다.
유화제를 첨가한 것이 분명한 빵은 부드러웠고 고기는 저품질이지만 감칠맛이 났다.
"고마워."
도훈은 그 한 입을 삼키고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가슴이 뛰었다. 무언가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대로 저 뒤에서 아양을 떨고 있는 이빨 큰 외계인을 날려 버리면......
자신은 빵셔틀에서 정말 탈출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래. 날려 버리자. 이번 시간에 시비를 거는거야. 어떻게 걸어도 좋아. 저런 놈에게까지 무시당할 필요는 없어.'
이렇게 생각한 그가 주먹을 쥐며 뒤를 돌아볼 때였다.
그 순간은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슬로우 모션과도 같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연인지 아닌지 그는 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재현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너무나도 환하면서도 불안했다.
"......"
도훈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전의를 상실한 것이다. 희빈을 증오하는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지만 왠지 이대로 공격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쥐었던 주먹을 조용히 폈다.
몇 번의 쉬는 시간이 더 지나고 그 때마다 '쉬는시간'을 성호에게 갖다주는 일을 충실히 한 도훈은, 이제 학교 생활에서 마지막 남은 자신의 몫, 청소를 마치고 하교하고 있었다.
"궈, 권도훈 마, 맞지?"
그 때 등 뒤에서 어떤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훈은 뒤를 돌아 보았다.
검은 뿔테 안경에 부스스한 머리, 얼굴에는 여드름 흉터가 가득한 소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맞는데 넌 누구지?"
도훈은 그에게 물었다. 이미 모든 학생들은 하교한 뒤라 교내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소년은 희빈보다는 작지만 다른 이들보다는 큰, 마치 생쥐의 그 것과도 같은 앞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 나야. 나. 유, 윤형진."
"윤형진? 네가?'
"으, 으응."
형진은 유난히 말을 심하게 더듬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그만큼 자신감이 상실되어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래, 형진아. 무슨 일이야?"
"아, 아니. 그, 그냥. 어느 정도 생각을 굳혔나 싶, 싶어서......"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 그래...... 그, 그럼 가볼게...... 집에서 메신저로 말 걸어두 돼지?"
형진은 뒤를 돌아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야 잠깐만!"
도훈은 이번엔 망설임 없이 그를 불렀다. 이 것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왜, 왜 그래?"
"빵이라도 먹자. 편의점에서."
도훈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시 멈칫하던 형진도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학교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편의점에 간 두 사람은 빵과 우유를 사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 그러니깐 자, 장희빈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응. 그 놈, 정말 그렇게 애들이 싫어해?"
"으, 으응. 싫어하긴...... 하, 하지. 근데 왜?"
"그러니깐......"
도훈은 형진에게 오늘 재현과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형진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조용히 그 얘기를 들었다.
"하, 하면 안 돼."
"응? 어째서?"
"어, 어쨌든 안 돼! 저, 전부 김재현 그 놈이 수, 수작부리는거야. 예, 옛날부터 그 놈 시키는 대로 해, 해서 잘 되는 놈 한 명도 못 봤어."
"뭐?"
형진은 고개를 푹 수그리더니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그 놈은...... 저, 정말 나쁜 놈이야. 성호나 한민이 같은 애들보다 더......"
"한민이?"
"우, 우리반에서 나한테 일을 시키는 녀, 녀석이야. 하, 하지만 걔들은 그냥 시, 시키거나 잘 못 했을 때 때, 때리기나 하지...... 기, 김재현 그, 그 나쁜 새끼는......"
"......"
"아, 아무튼 그, 그 놈이랑 엮이면 안 돼! 무, 무슨 오타쿠는 주, 죽어도 된다나 뭐라나...... 그, 그 놈 때문에 나, 난 인생을 망쳤다고!!"
형진은 정말 억울한 듯 눈물을 글썽였다. 그 순간 도훈은 재현에 대한 친밀감이 모두 적대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오타쿠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눈 앞의 이 소년이 인생을 망쳤다고 한다.
"정말 그 이유 하나 만으로 그래? 그 놈이?"
"으, 으응. 그, 그 놈...... 저, 정말 나쁜 놈이야! 마, 만화로 비유하자면...... 으, 으음...... 뭐가 좋을까?"
형진은 앞니를 달싹이며 뭔가를 되뇌이기 시작했다. 도훈은 한 숨을 쉬며 그의 행위를 제지했다. 어차피 만화 얘기 꺼내봤자 못 알아 듣고 혹시라도 잘못했다간 자신도 오타쿠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됐어. 얘기 안해도 돼.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으, 으응."
"하지만 아무래도 네 생각만 듣고 재현이를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깐 내가 희빈이를 까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것보다 결정했다. 나, 가입시켜줘. 너희 빵셔틀 연합회에."
"저, 정말?"
형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따, 따라와. 마, 마침 오늘은 초대 회장님이 내려오시는 날이야!"
형진은 도훈의 손을 잡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의 갑작스런 행위에 당황하던 도훈이었지만 이내 미소를 머금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로써 그는 다시 태어난다. 평범한 빵셔틀이 아닌, 복수를 꿈꾸는 빵셔틀 연합회의 회원으로써.
그의 타깃은 우선적으로 성호와 희빈이다. 그리고 만약 여건이 된다면, 그리고 그만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재현 역시 그의 분노를 비껴나가지 못할 것이다.
형진이 그를 끌고 간 곳은 지하철 역 주변 상가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자, 잠깐만. 형진아. 여긴 호프집이잖아."
형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 그래. 호, 호프집이지."
"근데 이런데 막 써도 돼?"
"무, 물론 아, 안 되지만...... 오, 오늘은 괜찮아. 지, 집회날 만큼은 우, 우리도 일진 녀석들처럼 노, 놀아보자구."
형진은 엄지 손가락을 내밀었다. 도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대로다. 일진이든 빵셔틀이든 인간인데, 자신이라고 호프집에서 술 못 마실 이유는 없지 않은가?
"어, 어차피 오늘은 우리 여, 역대 회장님들이 전세내서 아무도 못 들어와. 자, 드, 들어와. 환영해. 여기가 우리의 나, 낙원이야."
문이 열리고 어두컴컴한 지하 1층의 호프집이 드러났다. 그 광경은 낙원이라기 보다는 도박장 같았지만, 형진이 낙원이라고 믿으니 별로 하고픈 말은 없었다.
"형진 님이군요!"
한 소년이 다가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예. 접니다."
형진은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로 향했다.
"옆에 그 분은......?"
"아, 제 친굽니다. 권도훈이라고 하지요. 오늘 입회하기 위해 왔습니다. 입회인은 저구요."
"안녕하세요."
도훈은 그의 안내를 받아 인사를 했다. 소년 역시 웃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우리가 꼭 손에 넣을 자유를 위해."
그리고 그 소년은 가버렸다. 호프집, 아니 집회장에 들어온 이후부터 형진은 크게 바뀌었다. 더듬거리던 말버릇도 다 사라지고 다시 아침에 컴퓨터에서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움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 것은 키보드 워리어의 전형적인 현상이지만 아직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훈으로써는 그 것까지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집회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각 학교의 빵셔틀들이 삼삼오오 모여 테이블을 차지하고 서로의 정보를 교환했다. 이번이 처음인 도훈은 그 어떤 정보도 제시하지 못하였지만 형진과 다른 빵셔틀들에 의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빵셔틀들의 낙원이라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이 호프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모든 이들의 눈빛에서 생기가 넘쳐났다. 모두들 팔짱을 끼고, 혹은 턱을 괴고.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한 몽롱한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도훈은 이런 어색한 분위기에 적응 못 한 채 안주 거리만 몇 번 주워먹다가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너네 왜 호프집와서 술은 안 먹고 물만 마시는거야?"
그랬다. 모두들 술은 안 마시고 물과 안주만 주워 먹고 있었던 것이다.
"뭐? 도훈아, 어떻게 학생이 술을 먹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우린 일진들이 아냐."
형진이 핀잔했다. 도훈은 할 말을 잃은 채 물을 단번에 들이켰다.
"컥! 컥!"
너무 급하게 들이킨 나머지 가슴이 아파왔다.
그가 그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괴로워 할 동안,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역대 회장님들이시다!"
"회장님!"
눈물 가득 고인 눈을 한 채 얼굴을 든 도훈이 본 것은 검은 양복 차림을 한 채 일렬로 걸어오고 있는 남자들이었다.
남자들 역시 겉모습은 그리 훌륭하지 않았지만 여기, 빵셔틀들의 아지트이자 낙원에서는 위엄있게 비춰졌다.
남자들은 총 네 명이었는데 그 중 초대 회장이라는 사람은 맨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당당한 체구의 수염을 기른 남자였다.
호프집 저 편에 있는 밴드를 위한 단상에 올라간 그들은 뒷짐을 지고 발을 어깨 너비정도로 벌린 채 섰다.
"초대 회장 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오늘 사회를 맡은 다른 고등학교의 빵셔틀 고현수가 초대 회장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안녕하신가."
간단한 인사였다. 하지만 모든 빵셔틀들이 그 인사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초대 회장님!"
지금 빵셔틀들은 그동안 쌓아온 울분을 한 번에 터뜨리 듯 우렁차게 외쳤다.
도훈 역시 얼떨떨한 모습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에 털퍽하고 주저 앉았다.
"형진아. 저 분이 초대 회장이셔?"
"응."
초대 회장은 빵셔틀이라기 보다는 그들을 부려먹는 일진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길게 기른 더벅 머리와 양쪽 귀에 달린 귀걸이는 도훈을 괴롭히던 성호를 생각나게 했다.
"박진헌. 우리 사락고 졸업생이셔. 우리 빵셔틀들의 우상이지."
형진은 눈을 반짝이며 진헌을 바라 보았다. 과연 그의 어떤 점이 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까?
"올 해 나이 스물 둘. 야주대 전자 공학과 재학 중. 빵셔틀 연합회를 만든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이었을 때 야."
형진이 아닌 또 다른 사락고의 빵셔틀이 입을 열었다.
"넌 이름이 뭐냐?"
"임병주. 넌 권도훈이지?"
병주는 눈을 지그시 감더니 턱으로 진헌을 가리켰다. 우선은 듣자는 제스처였다. 도훈 역시 초대 회장의 연설을 한 번 들어보고 싶었기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우리가 그들보다 못한 것이 뭐냐? 힘? 머리?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그 놈들도 인간인 이상 맞으면 아프고, 못 푸는 문제가 있기 마련이다!"
초대 회장은 발을 한 번 크게 구르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서 마음가짐이란 무엇이냐? 용기! 결의! 이런 것이다! 그 놈들은 망설이지 않는다! 우선 행하고 본다! 그에 비해 우린 어떠하냐?! 뭔가 행하기 전에 돌아올 보복부터 생각하지 않느냐!"
그 말은 비수처럼 날아와 도훈의 가슴 속 깊이 박혔다.
그 말대로다. 얼마 전의 그도 희빈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했었지만 다가올 보복이 두려워 행동을 취하지 못했었다.
갑자기 오늘 오전 재현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야, 너 힘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이빨 녀석에게 당하고 사냐?
-그래. 임마. 왜 그딴 놈한테 당하고 살아.
-우리 반 대부분이 그 새낄 싫어해. 그냥 확 패버려.
-그 새낄 빵셔틀로 만들어 버리라고.
-그 새낄 빵셔틀로 만들어......
-그 새낄 빵셔틀로......
-그 새낄......
재현이 그에게 불어 넣었던 마지막 한 마디가 계속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초대 회장 진헌의 연설과 오늘 재현이 그에게 불어 넣은 용기가 그의 가슴 속에서 요동쳤다.
그는 결심했다. 조만간 기회를 보아 이빨 큰 외계인 녀석을 죽여 놓겠다고.
"자, 그럼 새로운 회원의 입회식이 있겠습니다."
현수가 다시 마이크를 받아 말했다. 이제는 도훈을 비롯한 새로운 빵셔틀 연합회원들이 주목을 받을 차례였다.
"자, 그럼 호명되신 분들은 한 분씩 나와주세요. 한립 기계 공업 고등학교 2학년 최한결."
"예!"
사락고 쪽 테이블과 정 반대편에 있는 테이블에서 이름과 안 어울리는 거구의 소년이 일어나 단상으로 향했다.
"저, 저런 애도 빵셔틀이 되는거야?"
도훈은 살짝 당황해 물었다. 형진과 병주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덩치가 크다고 무조건 센 건 아니니까."
"마음이 여리면 그럴 수도 있지."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회식을 바라 보았다.
초대 회장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말하는 내용에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던 한결은 그가 건네는 맥주 한 잔을 조금씩 마시더니 결국 그 잔을 비웠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그의 입회를 축복했다. 박수를 신나게 치던 도훈은 그제서야 자신이 새로운 회원으로 등록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형진의 어깨를 세게 움켜 쥐었다.
"혀, 형진아. 어떡하지? 나 아직 새 회원 가입 신청 안 했는데!"
형진은 그의 어깨를 잡고 있던 도훈의 손을 뿌리치며 답했다.
"그건 아까 내가 다 했으니까 걱정마. 것보다 조금만 기다려. 곧 너니깐."
"아, 으응."
언제 그런 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합회의 일이라면 사람이 바뀌는 형진이었다.
형진의 말대로 두 세 명의 새 회원이 더 의식을 끝내자 그 다음은 도훈의 차례였다.
"사락고 1학년. 권도훈."
"네."
도훈은 한결과는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고 일어섰다. 단상으로 올라가는 10여미터의 길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모두가 그를 꿰뚫어보는 듯 했다.
그들은 분명 아무 말 없이, 때론 격려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가 받아 들이기에 그 것은 채찍과도 같았다.
그는 힘겹게 발을 떼며 단상 위에 올랐다.
초대 회장 박진헌은 그 명성에 걸맞는 심오한 눈빛으로 그를 바 라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 검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 왜 빵셔틀들이 그를 그토록 따르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의지가 있었다.
의지를 잃은 채 심부름을 하는 빵셔틀들과는 다른 의지.
지금은 빵을 나르지만 언젠간 네 관을 옮겨주겠단 의지.
그의 눈빛에는 일진들과 그를 무시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분노와 적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뭐라고 했다.
하지만 도훈은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초대 회장의 눈빛에서 희망을 찾은 도훈의 심장은 격하게 요동쳤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맞는 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이켜라."
초대 회장이 이 때까지와 마찬가지로 맥주 한 잔을 내밀었다. 도훈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그 맥주를 받았다.
지구 상의 대부분의 종교에선 금주와 금욕, 금연을 미덕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순간 이 눈 앞의 맥주는 옛날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피로 만들었다는 포도주처럼 성스럽게 느껴졌다.
"예."
도훈은 단숨에 그 잔을 들이켰고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다시 태어났음을 깨달았다.
이제 그는 평범한 빵셔틀 권도훈이 아니다.
복수를 꿈꾸는 의지를 가진 빵셔틀 권도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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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만화를 너무 많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