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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호러
2012.03.19 19:24

홈쇼핑 1.

조회 수 1569 추천 수 0 댓글 0

개인적으로 상당히 재미있었던 글입니다 ^^ 끝까지 읽어봐주세요.

 

 

“주소 이전 신고도 안 했나. 해도 해도 너무하네.”

옆집 바닥은 항상 지저분했다.

 

식당 전단지와 각종 우편물들 이 범인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던 종이와 비닐들은 어느새 계단까지 내려와 해옥의 통행을 방해했다.

 

마치 점점 번져 가는 습진처럼.

위의 두 층만 주거용으로 쓰는 4층짜리 건물에는 우편함이 없 었다.

 

집 주인에게 몇 번이나 건의를 했지만 홀로 사는 젊은 여자의 말이라 그런지 대답이 늘 건성이었다.

 

어차피 해옥 앞으로 오는 우편물이라고 해 봐야 핸드폰, 인터 넷, 신용카드 등의 청구서가 대부분이었다.

 

괜히 집주인의 심기를 건드려서 모처럼 저렴한 보증금으로 들 어온 월세 집을 나가고 싶진 않았다. 문제는 옆집이었다.

3층은 계단에서 오른쪽으로 두 집이 나란히 위치했다. 그중 왼 쪽이 해옥의 집이었다.

 

현 관문 상단에는 유성 매직으로 휘갈겨 쓴 301이라는 숫자가 적 혀 있었다.

 

집으로 향하던 해옥은 전단지와 우편물들이 계단을 세 칸이나 차지한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발로 전단지를 밀어내고 자신의 집을 지나 4층까지 성큼 성큼 계단을 올랐다. 4층은 전체가 건물 주인의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해옥은 팔짱을 꼈다. 가래 끓는 남자의 목소 리가 들렸다.

“뉘쇼? 이 시간에.”

“301호예요.”

찰칵,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앞머리가 훤한 50대 초반의 남자가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 아가씨가 시간이 몇 신데. 날 밝을 때 놔두고 왜 매번 이러 는지 몰라.”

“날 밝을 땐 항상 밖에 있는걸요. 집세 낼 돈은 벌어야죠.”

집주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해옥도 따라 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저씨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보시잖아요. 저 쓰레기들 좀 어떻게 해 주세요.

 

그냥 갖다 버릴 수도 없고 어두울 때 미끄러지기라도 할까 봐 겁난다고요.”

“이사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보면, 그냥 버려도 상관없는 것들일 게 뻔하지.

 

내가 날 밝으면 싹 갖다 버릴 테니까 들어가기 전에 아가씨 거 섞여 있는지 확인해봐. 됐지?”

해옥은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3층으로 몸을 돌렸다. 몇 계 단 내려가기도 전에 집 주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참, 구정 지났으니까 다음 달부터는 약속대로 5만 원 오르 는 거 알지?”

해옥의 볼이 한순간 씰룩 하고 움직였다.

“네, 알아요.”

집주인은 대답 없이 문을 닫았다. 찰칵,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해옥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아랫입술로 바람을 뿜어 올렸 다.

 

그러고는 물이라도 쏟은 듯 어지러운 3층 바닥에 쪼그리고 앉 아 자신의 우편물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몇 개의 우편물을 건져 낸 후 해옥은 손 바닥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마자 해옥은 현관 등부터 켰다. 가방을 벗고 실내등 을 켜며 우편물들의 겉봉을 살폈다.

 

네 개의 우편물 중 세 개는 각각 신용카드, 핸드폰, 인터넷의 요금 청구서였다. 소파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나머지 한 개를 보았다.

 

청구 서와 같은 크기의 우편물이었다.

‘302호 장석윤 귀하’

장석윤은 옆집 남자의 이름이었다. 즉 이 우편물은 해옥의 것 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몽땅 쓰레기통행일 테니 굳이 밖에 둘 필요 도 없겠지.”

그러면서 해옥은 현관 근처의 폐지통 앞으로 다가갔다. 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겉봉을 확인하는 해옥.

 

이름 밑으로 아 래 3분의 1정도가 잘린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초특급 할인’

해옥은 ‘할인’이라는 말에 약했다.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갈등에 빠졌다. 남의 우편물을 함부로 뜯어도 되나 싶은 죄책감,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았다.

 

그냥 버리든 보고 버리든, 어차피 버리는 것은 똑같으니까. 해 옥이 소파에 앉아 우편물을 개봉했다.

 

세 번 접힌 분홍색 A4 용지가 내용물의 전부였다. 그 안에는 안내 사항이 담겨 있었다.

‘초특급 할인! 이번 주는 30 회 특집입니다. 변함없이 오전 두 시 428번에서 만나요.’

그리고 발신인은 <리얼홈쇼핑>이었다.

“홈쇼핑이라는 걸 보니까 428번은 채널인 모양인데…. 처음 들 어보는 이름이네. 아니, 그런데 428번에 방송이 나왔었나?”

해옥이 소파 팔걸이에 올려둔 리모컨을 집었다. 티브이 전원 을 켜고 채널을 428번으로 돌렸다.

 

예상대로 벌들의 향연과도 같은 흑백 화면이 지지직거리는 소 음과 함께 나타났다.

 

생각해 보니 유선 방송의 채널은 기껏해야 95개 정도였고 100 번 이상으로 채널을 옮긴 적은 거의 없었다.

 

처음 티브이를 샀을 때 호기심에 나오지도 않는 채널을 마구 돌린 기억은 있으나 428번까지 갔을 리는 만무했다.

이쯤 되자 마약 같은 호기심이 해옥을 자극했다. 요즘 즐겨 보 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초특급 할인’, ‘30회 특집’, ‘오전 두 시’, ‘428번’ 등의 토막 난 문구들이 제멋대로 부유하는 중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눈꺼 풀은 반항했고 안대를 착용하든 양을 세든 허사였다.

“짜증나. 여섯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두어 번을 더 뒤척였지만 잠은 저 멀리로 달아나 버린 지 오래 였다. 시계는 12시 30분. 해옥은 다시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켰다.

 

심드렁한 얼굴로 리모콘을 조작하다가 문득 428번으로 채널을 맞추었다. 화면은 여전히 흑백. 해옥은 앞의 채널로 돌 아왔다.

 

영화 채널들은 일제히 연소자 관람 불가의 영화들을 방영하고 있었다. 해옥은 그중 하나에 채널을 고정시켰다.

 

미 남 배우들이 금지된 사랑에 빠져 파국을 맞는 동성애 영화였 다.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지만 결국 서로를 찾아 탐닉하고야 마는 주인공들. 그들은 아내와 아이가 있는 가장 이었다.

“내가 왜 이 시간에 이딴 영화를 보고 있는 거야. 나도 이러면 안 되는데. 양키들은 왜 대머리어도 멋있을까.”

1시 15분. 시간은 지독하게 안 갔다. 해옥은 핸드폰을 잡아 주 소록을 천천히 살폈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연락처가 보였다.

 

저장된 이름은 여전히 ‘여보’였다. 순간 홍삼처럼 얼굴이 벌게 진 해옥이 전화번호 삭제를 눌렀다가 ‘정말 삭제하겠습니 까?

 

’라는 문구가 나오자 ‘아니요’를 선택했다. 대신 이름을 바꾸 었다.

주소록을 다시 열었다. 전화번호가 이렇게나 많은데 연락하는 사람은 10명 안팎이었다.

 

나머지는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고 문자한 뒤 감감무소식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해옥은 자주 연락하는 10명 중 하나를 골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덟 번의 신호음 끝에 잠에 취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희쓰! 자고 있었어?” “너…… 지금 몇 시야.”

해옥이 시계를 봤다.

“1시 30분 조금 안 됐네. 자고 있었구나. 미안해. 나는 네가 밤 일하니까 지금쯤 깨어 있을 줄 알고….”

 

“작년에 그만뒀거든? 6시에 일어나야 되는데. 아, 진짜.” “야, 나도 6시에 일어나야 돼. 피곤한 척은 혼자 다하네, 기지배 가.”

“그럼 자빠져 잘 것이지. 왜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죽을래?” “야야. 집주인 그 늙은이가 집세를 5만 원이나 올린단다. 짜증 나 죽겠어.”

 

“죽지 말고 이사 가.” “그래도 다른 데 비교하면 싼 편이야. 요즘 보증금 500에 들어 갈 수 있는 데가 흔한 줄 아냐?” “그럼 그냥 살아, 이년아!”

마침 티브이에서는 남자들의 격렬한 베드신이 시작되었다. 해 옥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야야. 그런데 너 혹시 리얼홈쇼핑이라고 들어 봤냐?” “몰라. 홈쇼핑에 관심 없어.” “오늘 2시에 428번에서 30회 특집으로 방영한대.

 

초특급 할인 이래.” “뭐 파는데?” “그거야 봐야 알지.” “너 지금 그거 기다린다고 깨어 있는 거냐? 남자 빤쓰 팔면 가 관이겠다.”

 

“30회 특집인데 속옷을 팔겠냐? 생각 좀 해라.” “생각은 너나 실컷 하고 이제 끊자. 제발, 응?”

베드신이 절정에 달할 때 화면 속 방의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여 자가 들이닥쳤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여자의 오른손 에는 팔뚝의 반쯤 되는 길이의 과도가 있었다.

“야, 428번 한번 틀어 봐. 밑져야 본전이잖아.” “밑지면 손해지, 어떻게 본전이야, 멍청아. 우리 집 테레비는 100번까지밖에 안 나와.

 

나 이제 끊는다. 안녕.” “야, 기다려 봐. 야…”

통화가 끊겼다. 해옥은 성깔 더러운 년이라고 구시렁거리며 시계를 쳐다봤다. 1시45분. 이래저래 시간은 흘렀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였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밑으로 힘 빠진 지렁 이처럼 꿈틀거리는 남자들이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올 때 시각이 1시 58분이었다. 해옥은 지체 없이 428번으로 채널을 돌렸다. 여전히 흑백 화 면.

 

해옥은 소리를 줄이고 냉장고에서 350ml 캔맥주를 하나 꺼냈다. 꼭지를 따고 한 모금을 막 목에 적실 무렵, 티브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먼저 지지직거리던 소음이 뚝 끊겼다. 해옥은 볼륨을 원상태로 돌렸다.

 

곧 있어 합창 교향곡의 후렴 과 함께 90년대 초가 연상되는 알록달록한 프로그램명이 나타 났다. 리얼홈쇼핑.

“내가 파워포인트로 만들어도 저거보단 낫겠다.”

해옥이 중얼거렸다. 1분여의 오프닝이 끝나고 광고 없이 진행 자가 나타났다.

 

이런 게릴라 식 프로그램에 광고가 붙는 게 더 웃기겠다고 생각하며 해옥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진행 자는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으로 정장 차림의 깔끔한 모습이었 다.

 

둘 다 미남, 미녀는 아니었지만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호 감 가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리얼홈쇼핑 진행을 맡은 손영호.” “황경은입니다.”

진행자 뒤편에는 새하얀 천으로 덮어 놓은 길쭉한 탁자가 있 었고, 그 옆에는 역시 하얀 천으로 덮어 놓은 세로로 길쭉한 물 체가 있었다.

 

길쭉한 물체는 어쩐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바로 리얼홈쇼핑이 30회를 맞 은 날입니다!

 

매회 완판 신화를 이룩하던 리얼홈쇼핑, 이 모든 게 회원 여러분의 덕입니다.”

남자에 이어 여자가 말했다.

“오늘은 여러분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조금 특별한 물건을 가 져왔어요. 금방 소진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주저하지 말고 전 화주세요.”

스튜디오 환경은 별로였다. 중앙 조명 하나에 사이드 조명 넷, 홈쇼핑 로고도 없었고, 외벽이나 바닥도 오래된 건물의 흔적 이 역력했다.

 

화면 하단에 나타난 전화번호는 대표 번호가 아 닌 일반 번호였는데 지역 번호로 볼 때 서울이었다.

그 밖에 사람을 현혹시키는 자막은 일절 없었다. 방송 환경이 이렇게 열악한데 좋은 물건이 나올까? 해옥은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부터 물건을 공개하겠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남자와 여자는 탁자의 양 끝에 서서 천을 붙잡았다.

 

카메라를 주시하며 잠시 빙긋 웃던 둘은 “짜자 잔!”을 외치며 손을 움직였다.

“뭐야, 저게!”

해옥이 소리를 질렀다. 탁자 위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곰인 형이었다.

 

양손을 나란히 했을 때와 비슷한 크기에, ‘푸우’를 따 라한 게 분명한 빨간색 배꼽티를 입은 모습이었다.

 

해옥은 당 장이라도 티브이를 꺼 버릴 심산으로 리모컨을 들었다.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요청이 쇄도한 상품이지만 워낙 고가라 엄두를 못 냈던 바로 그 상품입니다.

 

루마니아 현지에 서 저희 담당자가 극적으로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자그마치 50프로나 할인된 가격으로 모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가 인형을 들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 다.

“네, 오늘의 상품은 바로 저주의 인형입니다.”

해옥이 리모컨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런 조악한 인형을 루마 니아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것도 이해 불가였는데,

 

‘저주의 인 형’이라는 이름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조금 있자 전화번호 옆 으로 6자리의 숫자가 떴는데 아무래도 인형의 가격인 모양이 었다.

 

그런데,      “일시백천만십만백만… 미친, 250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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