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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2011.07.17 14:59

11시 11분의 전화-4

조회 수 2338 추천 수 0 댓글 0
"소개팅 나와라. 좋은 여자 한 명 소개해 줄게. 나랑 같은 부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인데, 예전에 한 번 너랑 나랑 찍은 사진 보고 관심이 좀 생겼던 모양이더라. 예쁘기도 되게 예쁘고. 솔직히 너 같은 놈한테는 아까운 여자지만, 내가 특별히 양보한다! 실연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풀어야지?"

불쑥 전화를 건 친구가 뜬금없이 꺼낸 말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쩐지 요 며칠간 집에 와서 영양가 많은 음식을 먹이려 한다 싶더니, 소개팅 때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잘 먹은 덕분에 볼품없을 정도로 야위지는 않았지만, 저의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대해 나는 줄곧 의문을 품어왔었다. 그런데, 배후에 숨겨둔 목적이 설마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그러나 사실 내가 더욱 당황한 이유는, 역시 11시 11분의 전화 때문이었다. 누군가 새로 여자를 만나게 된다면 언젠가는 또 그 전화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게다가 나는 전화의 주인공에게 이미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다. 말솜씨가 서툴고 어수룩한 나는, 다시 예전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예전 여자친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가 홀로 지낸 지는 거의 반년이 되어가고 있었고, 겨울이 찾아오는 시점에서 이젠 나도 사람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자, 녀석은 답답했던지 또 곧장 달려와서 반강제로 나를 씻기고 면도를 시켰으며 머리를 다듬고 옷까지 사 주었다. 그러고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친구는 나에게 다음 날 약속에 응할 것을 거듭 요구하며 마지못해 돌아갔다.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내 성격을, 녀석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에도 전화는 걸려 왔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저… 내일, 소개팅 나갑니다. 그동안 제 얘기를 들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통화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어떤 분이신지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그리워질지도 모르겠구요. 그렇지만 용서는 하지 않을 겁니다."

두 세계의 경계와도 같았던 그녀의 비웃음 소리가 들릴 새도 없이, 이번에는 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것도 하나의 이별이라는 생각에, 나조차도 놀랄 만큼 슬펐다.

"안녕하세요, 오래 기다리셨죠?"
"아뇨, 방금 온 걸요."

오랜만의 외출은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보이게 했지만, 어째서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만은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살짝 치켜 올라간 큰 눈, 제법 높은 편인 코, 다부진 입술에 날카로운 얼굴선을 가진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예쁘지만 왠지 얄미운 얼굴이었다. 한 마디로, 얼굴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차라리 조금 못 생겼더라도 정감이 가는 얼굴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에 대한 내 생각은 금방 바뀌었다. 우선 얄미운 인상과는 달리 차분하고 어딘가 친근한 목소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또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와 그녀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났음에도 마치 나의 일부라도 되는 양 나를 속속들이 꿰뚫는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냄에 따라, 나는 그녀에 대해 점차 호감을 품게 됐다.

하긴 애초부터 나는 외모보다는 성격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몇 달이나 사람의 온기에 굶주려 있던 나였다. 처음 만난 여자에 대한 호감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부풀어갔다. 하지만 시간은 금방 흘러갔고, 어느덧 밤 11시가 넘었다. 흡족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한 그녀와 나는, 헤어지기 전에 휴대폰 번호를 교환하기로 했다. 여자에게 먼저 전화를 시키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내 휴대폰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번호 찍어 주세요. 제가 전화할게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번호를 찍더니, 양 손을 허리에 얹고 말했다.

"저는 여기서 지하철 타면 되거든요. 제가 안 보이게 되면 전화 거세요. 또 만나요!"

나는 그녀에게 택시를 타라고 권유했으나, 그녀는 지하철이 더 편하다며 한사코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이윽고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더니, 몸을 돌려 지하도로 내려갔다. 지하도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계단을 울리는 발랄한 하이힐 소리가 지상에 있는 나에게까지 들렸다. 나는 그 순진함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내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통화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에 표시된 이름은- 스토커.

한 순간, 심장이 멎었다. 제발 아니길, 착각이길 바라며 떨리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11분.

"여보세요?"
"…."

익숙한 침묵. 다리가 떨리다 못해 힘이 빠져서 풀리려 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훗, 후훗, 하하. 하하하하!!"

계단을 도로 올라오는 구두 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 메아리는 더 이상 발랄하지 않았다. 점차 가까이 다가온 발소리는, 내 등 바로 뒤에서 인기척으로 변했다. 나는 여전히 휴대폰을 손에 든 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전화를 받은 채, 내 바로 뒤에서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웃었다. 언젠가 들었던,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수화기와 등 뒤에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많이 그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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