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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2011.07.10 23:01

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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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팔! 이것만은 안 된다고. 이것만은, 씨파알!”



이미 일은 벌어졌다. 

내가 여기서 당하면 필중 또한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무슨 사정으로 주저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우쉬히우히취히



참기 힘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얼굴 전체에는 끈적끈적한 느낌이 가득하다. 



“끄으으윽.”



아귀힘이 조금 더 강해진다 싶더니, 급기야는 지면에서 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필중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다. 

필중이 껌을 뱉어주지 않는다면 나를 비롯해 내 가족까지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내와 은비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내가 이대로 죽으면, 이대로 죽어선, 이대로 죽는다면...... 

안 돼. 안 돼! 

제발 껌을 뱉어줘! 



“퉤!!”



내 염원이 닿았던 것일까? 

드디어 그토록 바라던 효과음이 귀에 꽂혔다. 

그리고,



-우쉬히우히취히퀴퀴!



괴물의 격양된 소리가 들려온다. 

이윽고 손아귀 힘이 점점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얼마 안 있어,



-털썩.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괴물에게 풀려난 것이다. 



“흐읍, 흐읍, 흐읍!”



나는 그 상태로 격하게 숨부터 몰아쉬었다. 

비릿한 냄새가 계속 코 주위를 맴돌고 있는 탓이었다. 



“어서 나와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일그러진 표정으로 필중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상태로 다시 고개를 조금만 틀어보았다. 

껌에 정신이 팔려 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괴물이 보인다. 

어째, 아까보다 더 심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지금 여유부리는 거예요? 어서 나와요!” 



“알고 있어!”



다리가 후들거려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후배직원에게 쪽팔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팔. 일을 저질렀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잡아요!”



어느새 필중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그런 건 아니야. 흐으읍.”



머쓱한 변명을 하며 필중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오줌까지 쌀 정도였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시네요.” 



이런. 

찔끔 지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로 티가 날만큼 지린 모양이다. 

그러니까 바지에 오줌을 말이다.



“이런 상황에 상사 거시기나 쳐다 보냐?”



“됐으니까 어서 가요. 어서!”



필중의 도움을 받으며 문 밖으로 달렸다. 

그리고 곧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좌측이냐, 우측이냐. 



“어, 어디로 갈까요.”



잠시 생각한 후에 필중의 말을 받았다. 



“우측. 우측으로 가자.”



“음.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저 괴물이 그 쪽에서 온 거거든.”



“다른 괴물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분명 득실..” 



내가 말을 끊었다.



“알어. 그래도 확률적으로 그나마 낫잖아.”



필중이 딱히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디든 마찬가지잖아. 우선 가자고 어서!”



“알았어요. 알았어.”



필중과 함께 우측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402호 앞까지 도달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춰야만했다. 



“잠깐만!”



갑자기 걸음을 멈추니, 나를 부축하고 있던 필중의 몸이 앞으로 휘청했다.



“아 뭐에요 갑자기!”



“손전등! 손전등을 주워 와야 해!”



아까 전에 문 앞에서 떨어뜨린 손전등이 생각난 것이었다. 



“제 핸드폰으로 비추면 되잖아요. 지금 어떻게 다시 가요!”



아니, 핸드폰 불빛만으로는 힘들다. 

괴물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야 확보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있어야 해. 나 이제 괜찮으니까 내가 갔다 올게.”



필중의 목에 걸쳐있던 오른팔을 제자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몸을 돌려 403호 앞을 향해 뛰려는 순간, 

필중이 내 팔을 붙잡았다.



“후. 제가 갈게요. 이번엔 대리님이 껌을 뱉을 차례잖아요.”



말을 마친 필중이 몸을 움직였고,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뒤를 따랐다. 

필중은 403호 문 앞으로 되돌아가 신속하게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을 주웠다. 



“자, 됐죠? 그럼 어서 가...커헉!”



터져오는 필중의 신음소리. 

그의 발을 휘감은 이형적인 모습의 손이 무엇 때문인지를 짐작케 해주었다. 



“부, 붙잡혔어요 으아아악”



필중의 몸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문 안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상황 보고 있을 겨를이 없다. 

어서 필중을 구해야 한다.



“퉤!”



급하게 뱉은 껌이 원호를 그리지 못하고, 직선으로 뻗어나가 지근거리에 떨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괴물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필중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자 가자. 어서, 어서!”



“받아요, 손전등.”



필중이 건 낸 손전등을 손에 쥐고 다시 우측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필중이 예의 그 오부장 덩어리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두 개를 꺼냈는데 하나는 자기 입에 넣고, 하나는 나에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 입에 넣으며 슬쩍 필중의 바지를 쳐다보았다. 

볼록 튀어나온 주머니에는 적어도 덩어리가 세 개 이상은 더 있어 보였다.



“껌이 다 떨어진 것도 아닌데, 아까는 왜 그렇게 뱉기 싫어한 거야?”



“......”



돌아오는 필중의 대답은 없었다. 

어쨌든 우리는 우측 복도 끝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괴물과 조우했던 공포의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이런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면서 왔다니. 



-딸칵



손전등의 스위치를 켰다. 

그러자 화악하고 빛이 뿜어져 나온다. 

핸드폰 불빛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세기였다. 

그 불빛이 어둠을 향해 둥그런 영역을 남기기 시작하자, 

어두워서 보지 못했던 핏자국이나, 역겨운 잔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시 이리저리 손전등을 비춰보며 이곳저곳을 살폈다. 

적어도 3층 계단에는 괴물이 없다는 확신이 든 후 필중에게 말했다. 



“내려가자.”



필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숨을 죽인 채 한 계단씩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아까 그 껌 말이죠.”



중간쯤에서 필중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괴물 때문인지 매우 작은 목소리였다.



“그거. 오주임이에요.”



“뭐?”



내 되물음을 무시하고 필중이 계속해서 말했다.



“자신의 살을 씹으면 괴물이 되지 않는다고 했어요. 절대 뱉지 말라고 그랬는데…”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필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내뱉는 사이 어느새 3층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리고 2층 계단으로 몸을 돌리기 전 잠시 복도 쪽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다.



“흡!”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손전등에 비친, 그야말로 득실거리는 괴물들의 모습을 본 순간 말이다.



“이런! 돌려요 어서! 빛을 보면 반응한다고요!”



“뭣?”



순간 한녀석이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위휘쉬이위휘



그리고 그 특유의 괴성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다른 녀석들도 속속 몸을 돌리기 시작한다.



“씨, 씨♡ 뭐야!”



“괜히 불을 꺼놓은 줄 아세요? 뛰어요!”



손전등으로 2층 계단을 확인할 새도 없이 뛰기 시작했다. 



-스르륵, 쿵



괴물이 우리를 좇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제가 뭐랬어요. 3층에는 득실득실 하다고 했죠?”



정신없이 달리느라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이윽고 2층까지 내려왔다. 

뒤쪽으로 들리는 괴물들의 소리가 여전히 우리를 쫓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1층 계단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산재하게 널려있던 오부장의 덩어리가 떠올랐다.



“마지막 계단이야. 여기부터는 발조심 좀 해야할거야!”



“알았으니까 어서 계단이나 비춰요.”



이제 이 계단만 내려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지체할 시간은 없다. 



-화악



1층계단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리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뭐에요! 어서 내려가요!



필중이 외치며 내 어깨를 잡아 옆으로 재꼈다.



“갑자기 왜 멈추고 그…”



잠시 말을 멈춘 필중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씨발.”



내가 멈춘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계단을 떡하니 막고 있는 괴물이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지체하는 사이, 뒤를 쫓아오던 괴물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일단 제가 뒤 쪽에 껌을 뱉을게요. 대리님은 앞에다 뱉어 보세요.”



일단 필중의 말에 고개는 끄덕였지만 쉽지않아 보였다. 

워낙에 덩치가 큰 괴물이 좁은 계단을 딱 막고 서 있으니 딱히 껌 뱉을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앞에다 뱉자니 관심은 끌지 몰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것 같았다.

괴물을 넘어 계단 밖으로 껌을 뱉는 것이 최선이었는데, 아무래도 괴물의 육중한 몸에 걸릴 것 같았다. 



-퉤!



뒤 쪽으로 간 필중이 껌을 뱉은 모양이다. 

쫓아오던 괴물의 속도를 조금은 늦췄으리라. 

하지만 앞에서 오는 이 괴물에게는 도저히 답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든 괴물의 뒤 쪽으로, 웬만하면 계단 바깥으로 껌을 뱉어내야한다. 

최대한 입에 힘을 주고, 호흡을 골랐다. 



“퉤!"



그리고 뱉었다. 

단언컨데 지금까지 중 가장 만족스러운 곡선을 그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환상곡선도 괴물을 지나치지는 못했다. 

괴물의 몸 근처에 맞고 떨어져버린 것이다. 

우려대로 괴물은 그 자리에서 몸을 쭈그려 자신의 발밑에 있는 껌에 신경을 쏟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계단 한 가운데를 막아선 채로 말이다.



“이… 이런.”



막 내게 다가온 필중이 그 광경을 봤는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 일단 내려가자. 저 놈을 밟고서라도 건너가자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필중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무, 무리에요. 저렇게 막고 있는데.”



“방법이 없잖아. 그나마 지금이니까 가능한 거야.”



“무리에요. 하지만.”



필중이 잠시 눈을 지그시 감더니 뭔가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혼자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필중이 눈을 떳다. 

그리고 사뭇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가세요. 제가 미끼가 될 테니.”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무, 무슨 말이야! 지금 같이 내려가면 돼. 어서 가자!”



먼저 한 걸음 내려가 뒤를 돌아봤다. 

필중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저는 어차피 괴물로 변할 거예요. 사실, 아까 그 껌을 뱉으면 안 되는 거였거든요.”



“무, 무슨!”



괴물이 될 거라는 말에는 깜짝 놀랐지만, 미끼가 될테니 나만 살아 남으라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필중을 사지로 모는 꼴 아닌가.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어서 가세요! 놈 들이 다시 움직일 거라고요!”



“같이 가야해! 나만 살 순 없어!”



필중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리더니, 

주머니에서 남은 껌 모두를 꺼내 입에 넣는다. 

그리고 양 볼에 가득 찬 껌을 난폭하게 씹기 시작했다.



"질겅, 질겅, 질겅"



"너, 갑자기 뭐하는 거야?"



"질겅, 질겅, 질겅"



필중은 한동안 계속 껌을 씹는 데만 집중을 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질겅, 질겅, 질겅. 만약에 오주임을 만나면 전해주세요. 퉤!”




필중이 껌을 손에 뱉으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뱉은 껌을 꾹꾹 뭉쳐 손바닥 반 만한 크기로 만들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고.”



-우쉬이우히위히치



계단에 있던 괴물이 소리를 냈다. 

손전등을 비춰보니 이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팍에는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표독스러운 눈매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리님 잘 들으세요.”



필중의 말과 거의 동시에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가 아까 미쳐 말 하지 못 한 것들이 있어요. 앞으로 대리님에겐 꽤 중요한 이야기일수도 있죠. 그러니

까 음, 음.”



필중이 바지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핸드폰을 빼내, 내 쪽으로 내밀었다.



“이걸 가져가세요.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얼떨결에 핸드폰을 받아버렸다. 

어떤 도움을 의미하는지는 모르지만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절실한 도움이었다.



“너, 대체 뭘 할 작정이야?”



“사실 방금 전까지 대리님을 원망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니 오주임 그 새♡가 나만 멀쩡하게 둘 리가 없

어요. 분명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죠. 그러니 나한테만 지 살을 준 것이고.”



“너, 너 지금 무슨 말이야. 오주임이 또 뭔가 한 거야?”



-우쉬히이위히취이



괴물이 불과 세 걸음이면 닿을 정도까지 다가왔다. 

거기다 위층에서 들려오는 괴물의 소리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세요!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



필중이 소리치며 나를 옆쪽으로 밀었다. 

그렇게 계단 난간 쪽에 몸을 붙인 자세로 필중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필중은 껌을 든 손을 정면으로 내밀면서 괴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야 이 새♡야! 김필중!”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어느새 필중은 괴물과 마주섰다. 

그리고 내 쪽을 쳐다보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어서 가라고!!”



-우쉬이히위취이!!



-콰악!



괴물이 필중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 아무것도 돌이킬 수 없다. 

그저 필중의 바람대로 나라도 살기 위해 뛰어야 한다. 



“씨, 씨팔. 김필중!!”



나는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껌을 세 개나 뭉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괴물은 몸을 비집고 지나가는 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결국 나는 손쉽게 괴물을 피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필중을 미끼로 말이다. 



“대리님!”



괴물에게 벗어나 몇 계단을 더 내려갔을 때, 필중이 나를 불렀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손전등을 비추었다. 

하지만 괴물의 등에 가려 필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말소리만이 아직 필중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장기자랑 때. 대리님 사회 죽여줬던 거 아시죠?” 



“...별말씀을. 너야말로 필승 죽여줬다.”



“하하하. 고마워요 대리님. 정말 고마...”



-위쉬위휘이휘치



괴물의 소리가 들리면서, 필중의 소리가 끊어졌다. 

아마 방금 전 고맙다는 말이 생 전 마지막 말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누가 누구보고 고맙대.”



끓어오르는 슬픔을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계단을 모두 내려가기 전에 떨어뜨렸던 나의 핸드폰도 발견했지만 줍지 않았다. 

예상대로 망가져 있었는데, 괴물이 밟기라도 했는지 거의 산산조각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벽에 붙어있는 덩어리 하나를 떼어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씹어야 하니까 말이다. 

내 주먹만한 덩어리의, 일부분을 뜯어 입으로 가져갔다. 

어느새 친숙해진 비릿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진다. 

그렇게 나는 한 손에는 오부장의 덩어리를, 

나머지 한 손에는 필중의 핸드폰을 쥔 채 1층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손전등의 범위 안에 괴물의 모습이 잡히지 않았고, 그것은 문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이제 이 문만 열면, 

이 문만 열면 이곳을 나갈 수 있다. 

핸드폰과 덩어리를 왼 손에 쥐고, 오른 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았다. 

- 아. 아. 동사무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주민 여러분, 안개가 심하게 껴있습니다. 차량 운행은 삼가 주시

고, 밤길을 걸으실 때는 각별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



......



“후우우. 김필중... 나쁜 새끼.”



나는 잠시 문앞에 앉아 있었다. 

괴물이 문을 열고 나올 확률도 배재한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아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개새끼. 상사 엿 먹이는 것도 가지가지지. 지가 죽으면, 지가 죽으면. 하. 하. 하.”



웃음이 나오는 가 싶더니.



“큭, 큭, 크흑. 흑흑. 씨발.”



갑자기 울음이 나온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뭐가 된다는 전설은 있다지만, 웃다가 울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 따위 썰렁한 생각이라도 해야 마음이 조금은 진정 될 것 같았다. 



“좆같은 새끼. 웃냐?”



핸드폰을 열자마자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필중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화면의 윗부분에는 ‘기다리면 열린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볼 요양으로 슬라이드를 열었는데 감히 다른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화면을 넘기면 왠지 필중을 두 번 죽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정말 쓸데없이 거룩한 고정관념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이런 고착은 보기 좋게 깨져버렸다.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젊은 놈 핸드폰 벨소리가 ‘잘했군, 잘했어’라니. 



- 띠띠리리리 띠띠, 띠띠리리리 띠띠 



핸드폰 액정에는 필중의 사진대신, ‘발신자 표시 없음’ 이라는 글자만 크게 나타나 있었다. 

선뜻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꺼려졌지만, 

혹시라도 가족이라면 나에겐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의무가 있다. 

물론 얼마나 믿어줄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딸칵



통화버튼을 누르고 침을 한 번 꼴깍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



말은 없고 거슬리는 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적어도 실내는 아닌 모양이다.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핸드폰입니다.”



- 치이이이ㅡ 


- 치이이이ㅡ



“말씀 없으시면 끊겠...”



- 치이이- 누구?



막 핸드폰을 끊으려는 찰나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에 묻혀서 또렷하진 않았지만 어딘지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예. 말씀하세요. 김필중씨 직장 동료입니다.”



- 치이이이- 동료? 아, 하, 하하하.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난 영문을 몰라 마냥 그 웃음소리를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치이이이- 하하하. 대리님 오랜만입니다.



그 순간, 목소리의 주인공이 명확하게 떠올랐다. 

수화상태는 좋지 않지만, 절대 잊지 못할 그놈의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귀에 박혔다.



“너, 너 이 씨발 오주임이지?”



- 치이이이- 큭큭. 다짜고짜 욕을하세요. 그나저나 필중이 핸드폰을 왜 대리님이 가지고 있습니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삭혔다. 

이 인내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겠다.



“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 치이이이- 무슨 짓?



“몰라서 물어!? 이 씨팔...”



- 치이이이- 필중이는요?



“필중이 죽었다. 너 때문에 죽었다!”



- 치이이이- 이거 왜 이러시나. 따지고보면 저도 대리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요?



“뭐, 뭐? 이 개새끼가.”



- 치이이이- 크큭, 뭐 괜찮아요. 저는 나쁘지 않으니까. 



“너, 너, 너 어디야!”



- 치이이이- 필중이 불쌍해서 어쩌나.



“어디냐고 이새끼야!”



- 치이이이- 그건 보셨어요, 제 책상에서?



“어디야!”



- 치이이이- 대리님을 저주하겠다고 쓴 글 말이에요.



“봤어. 봤다고. 그러니까 딴 말 하지마. 나하고 얼굴 보면서 얘기하자고. 당장!”



- 치이이이- 큭큭큭. 큰 소리 치기는. 자기 처지도 모르면서.

“뭐라고?”

- 치이이이- 행운을 빕니다.

“뭐? 야. 오주...여보세요? 여보세요? 이 씨발. 여보세요!”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오주임은 예전의 오주임이 아니었다. 

비꼬는 말투야 예전에도 비슷했지만, 말 하는 내내 흘리는 그 기분 나쁜 조소가 거슬렸다. 

오주임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내게 행운을 빈다는 말을 한 걸까. 

어쨌든 오주임 덕분에 정신은 번쩍 들었다. 

이렇게 슬퍼하고 있을 새가 없다. 

필중에 이어 아내와 딸까지 잃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굳은 마음을 먹으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도 수월했다. 

막상 걸음을 떼려하자 아까보다 훨씬 짙어진 안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전등에 의지하면 그럭저럭 갈 수는 있을 것 같다.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안에는 여전히 그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겠지.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또 다시 필중의 웃는 모습이 나를 괴롭혔지만, 다행히 이번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



......



- 여...보세요.



“나야.”



-자, 자기야?



“응. 몸은 좀 어떤 것 같...?”



- 꺼, 껌. 껌! 껌 좀!



“은영아...”



- 제, 제발. 껌 좀 줘. 나, 나 미칠 것 같아. 나, 나.



“곧 갈 거니까. 조금만, 조금만 참아.”



- 모, 못참겠어. 나, 나, 꺼, 껌. 껌 좀. 제발. 제발.



“은비는 아무 이상 없지?”



- 제발, 제발...



“진정해!”



- 제, 제발, 제...



- 딸칵.



......



......



- 아. 아. 한 번 더 알립니다. 후평동 일대에 심한 안개가 껴 있으니 통행에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이상 동사무소였습니다.



......



......



비탈길로 들어섰다. 

손전등에 의지해서 길을 찾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거기에 산길인데다, 이곳엔 단 한 번만 왔을 뿐이었다. 



- 바스락, 바스락.



그나마 낙엽소리가 아니면 산길이라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잔가지나 돌 같은 장애물들을 효과적으로 피하기도 힘들어, 걸음 속도가 무척이나 느렸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안개 때문에 말이다. 

기억하기론 비탈길에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갈래 길이 나온다. 

그 곳에서 외진 곳과, 등산로로 나뉘었는데 그 가게는 분명 외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야가 막혀서야 구분이나 가능할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근처에 있던 바위에 걸쳐 앉았다. 

그리고 시계라도 볼 양으로 핸드폰 슬라이드를 열었다. 


아홉 시 십오 분. 

안개 낀 산길을 오밤중에 거니는 내 신세가 왠지 한스럽다. 

물끄러미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다가 메뉴를 눌러 보았다. 

여러 가지 메뉴가 나오고 그 중 내 눈에 띈 것은 ‘메시지 보관함’이었다. 



[오늘도 야근이야?


11/05 20:30 러브]



[미안해 일 하는줄 
몰랐어


11/05 20:10 러브]



[전화 왜 끊어?


11/05 20:06 러브]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과 문자를 주고받은 모양이다. 



[전화 좀 받아


11/05 19:50 러브] 



[내가 잘못 했어

그런데 너가 오해

한거라고 


11/05 19:30 러브]



[남자가 자꾸 소심하

게 그럴래?


11/05 19:28 러브]



밑으로 몇 개의 문자를 더 읽어보니 여자 친구가 확실한 것 같았다. 

내용으로 보아 한창 사랑싸움 중이었던 것 같다. 

문득 연애시절에 아내와 다퉜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닭살 커플이었지만, 가끔씩 심하게 다툴 때도 있었다. 

그 중 대부분은 내 까탈스러운 입 맛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결혼 후에도 가끔씩 마찰이 일어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나는 관음증이 발동한 변태 성욕자마냥 나머지 문자들도 빠르게 훑어나갔다. 



[아직도 화났어?


11/05 18:00 러브] 



[안 끝났어?


11/05 18:50 러브]



[니 여자친구도 생각

해야지? 명심해 


11/05 18:40 개♡♡]



아는 사람이 여자친구뿐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문득 이질적인 문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니 여자친구도 생각

해야지? 명심해 


11/05 18:40 개♡♡]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SK뷰 아파트 201동

1003호 맞지?


11/05 18:37 개♡♡]



[말 들어 살려준 은

혜도 모르고 여자친

구 예쁘더라?


11/05 18:34 개♡♡]



[안하겠다고? 


11/05 18:34 개♡♡]



[김대리한테 그걸 삼

키게 해 방법은 너가

알아서 생각하고


11/05 18:32 개♡♡]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정황상, 직감상, 이건 틀림없는 오주임이었다. 

필중에게 뭔가를 요구했지만, 그것을 거절하자 여자 친구를 들먹이며 협박을 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이렇게 최악으로 변할 수가 있는 거지? 



[그건 알 거 없어 너

만 괜찮으면 됐잖아


11/05 18:30 개♡♡] 



........



[쓸쓸해?ㅋㅋ 


11/05 15:20 개♡♡] 



뭔가 중요한 내용이겠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필중의 보낸 메시지를 볼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저장 해 두지 않은 것 같다. 

중간에 ‘김대리’라는 말이 나온 걸로 봐서는 나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대체 필중은 오주임에게 무슨 일을 당한 걸까. 



.......



.......



아까보다 부쩍 심하게 추위가 느껴진다. 

안개가 조금은 거치길 바랐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느낌이다. 

그러나 더 이상 지체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어차피 길은 두 개 뿐이다. 

그러니까 확률은 반반. 


자리에서 일어나 앞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잠시 머뭇하는 것도 잠시, 친숙한 오른쪽 길로 몸을 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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