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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2012.06.26 11:06

손녀 딸 시집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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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노인은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그는 원래 애주가가 아니었음에도 그 유혹은 꽤 컸다.

하지만 손녀딸의 영정앞에서 술잔을 기울이기에는 그의 뒷맛이 너무 씁슬했다.

감히 그럴 수 없다는 말이 맞으리라.




환하게 웃고있는 주희의 웃음이, 마치 일그러진 질책처럼 일견 소름돋게 보였다.

혼자 상을 지키고 서 있는동안 등더미에서 소름이 쭉쭉 타고올랐다.

박 노인은 생글생글 웃는 손녀의 영정사진을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마른 천둥이쳤다.

쪽 창으로 불빛이 희번뜩거리자 손녀의 웃는 낯이 더욱 생경스럽다.

노인은 절뚝거리는 걸음새로 상에 다가갔다.

그리고 기어코 영정사진을 엎어놓고 말았다.

다시 번개가 쳤다.









“뇌종양입니다.”

“뭐라캤시요? 뇌종양이?”

의사는 냉담하게 CT사진을 벽면에 걸쳤다.



며느리는 별반 놀란표정이 아니었다.

미리 듣고 알고있었음에 틀림없다.

저녘찬거리를 정하는 것처럼 미간만 가볍게 찌푸려져있을 뿐이었다.

예의상, 상황상, 정황상, 각본에 맞추어진 표정과 연기.



“이, 이보소 의사선상님. 뭐요, 지금 내가 죽는다는기요? 으이?”

의사는 박 노인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며느리도 천천히 훑어보았다.



반무테 안경 너머의 눈이 낱낱이 자신을 재고 있을 때, 노인은 바짝 긴장했고

며느리는 그 와중에 남자의 시선을 즐기는지 야릇한 웃음을 지었다.

경박스러운 행동을 탓할 노인의 안구는 의사의 입술에만 고정되어있었다.



“아뇨.”

박 노인의 주름진 입마디가 쭉 웃어올라갔다.

“안죽는깁니꺼?”

의사가 시선을 원무서류로 떨어뜨리더니 탁하고 소리내어 덮었다.

“두 달쯤 걸리시겠네요.”

의사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진료실을 나갔다.

뚱뚱한 간호사가 귀찮은 표정으로 팻말을 걸었다.

[12시 30분 ~ 1시 30분까지는 점심시간입니다.]



며느리가 하품을 억지로 참느라 입주위가 씰룩였다.

박 노인은 그 모든 상활을 낱낱이 느끼고 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는 날마다 같았다.

오늘이 어제와 같았고, 어제는 엊그제와 같았으니까.

그것들은 일종의 내일에 대한 확신이었다.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늙은이 특유의 확신. 



하지만 박 노인은 무언가가 깨져버렸다고 느꼈다.
 
오늘처럼 양상된 똑같은 하루들중에 60여개쯤 헤아리고나면 폭탄이 들어있는 것이다.
 
러시안룰렛게임처럼, 다음 방아쇠가 권총의 실탄을 머금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죽음은 화약내처럼 노인 주변에 매캐하게 부유했다.
 
건성으로 무얼드시고 싶냐고 물어보는 며느리에서, 출장중인 아들이 보내온 곧 귀국한다는 전갈까지.
 
모든 것들은 힘없이, 하지만 확실하게 죽음을을 머금고 있었다.


 
수술가능성 여부는 박노인의 어설픈 희망을 아예 빻아버렸다. 

성공 가능성 8%, 그 한자리 숫자와 두 달을 맞바꾸기에는 박 노인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모든 사람은, 특히 늙은이는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하는 법이니까.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주희가 보고 싶다.”

며느리가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동그랗게 치켜 뜬 눈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걔 요즘 바빠요.”

“할애비가 곧 뒤진다카이,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는거 아녀.”

며느리는 고개를 팩 처들고 박 노인을 노려보았다.
 
며느리의 시선을 받아내기엔 늙은이의 눈꺼풀이 너무 여렸다. 

때문에, 박노인은 쓸쓸이 고개를 떨구었다. 

손이 주섬 주섬 담배를 주워찾았지만 담배갑은 비어있었다. 



박노인의 병실은 휑했다. 같이 병실을 쓰던 할아범이 엊그제 가버린 까닭이었다.
 
사람한명이 죽어나자빠졌는데도 침대시트는 희고 정갈했다. 

자신이 죽고나서도 반듯이 개여져있을 침대보를 생각하니 불현듯 울화가 치밀어올랐다.

‘본래 늙은것들이란 남길 것이 유산밖에 없다고 그랬지.’










박노인은 실패한 노장이었다. 

막일을 하며 키워낸 아들이 명문대에 들어갔을 땐, 자신 인생도 한껏 피려는가보다 하고 벌쭉벌쭉 웃었다. 

하지만 영 말짱 쾅이었다.
 
아들놈은 저 잘난맛에 살기바빴고 얼굴한번보기가 이산가족보다 더한 자식이었다. 

하기야 남겨준 것 하나 없는 비루한 몸이니 별 수 있나, 하고 입맛만 쩍쩍 다시는게 그의 인생이었다.
 
그러다 늙어 이모양이 된 것이다. 

아들은 부잣집 딸내미와 눈이 맞아 그럭저럭 결혼도 치렀다. 

이래저래 치이고 무시받는 인생이다보니 며늘집 식구들이 그를 깔아보는 눈도 별로 개의치않았다. 



할멈은 일찍이 먼저 갔고, 칵 따라갈까 싶을때 즈음에 손녀딸아이가 태어났다. 

천사처럼 예쁜 아이였다. 

명색이 친할아버지인데 손녀딸 이름 정하는데 주둥이도 못 내밀었다. 

뭘로할까, 이걸로할까 이러쿵 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아들 며느리 내외를 멀뚱이 보면서 벙어리처럼 침만삼켰다. 

결국 지들끼리 이름을 정해놓고 좋다고 난리였다.
 
박노인은 자신이 정해놓은 이름을 고 예쁜아이에게 주고 싶었다. 

기회인지 뭔지 아들내외는 동사무소에 이름 입적시키는 것을 노인에게 미뤘다.
 
바빴기때문이었다. 

박노인은 이때다싶어 자신이 정한 이름을 호적에 냈다. 

“박주희라구요?”

“글타.”

“아니 아버지, 박연희라고 말씀드리지않았어요?”

노인은 바로 답하지못하고 입술을 비죽비죽댔다. 

“아 아무렴, 내가 아무렁텅 지은 이름을 가따 붙였겠니? 응? 다 생각허구 심사혀서...”

“아버님!!!!!!!!”

며느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마당에 박노인 눈만 커드래졌다.
 
이름이 대수인가. 

더구나 친할아버지가 붙였다는데. 

아무튼 며느리와 아들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박노인은 만족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첫째 손주 이름을 자신이 지었다는것이 뿌듯하고 어깨에 힘이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주희는 착한 아이였다. 

지 아비와 지 어미를 닮아 공부도 잘했다.
 
초등학교를 중퇴한 박노인에게 올 ‘수’ 성적표를 들고와 자랑스레 보이곤했다. 

박 노인은 뭐가뭔지 몰랐지만 마냥 웃기고 좋았다.
 
요건 뭘 잘했고, 조건 뭘 잘했다고 조잘조잘 떠느는 아이가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수가 없었다. 

소싯적 아들놈도 공부를 잘했지만, 막일을 끝내고 들어오면 항상 자고있을 뿐이었다.
 
박노인은 잃어버린 세월을 주희에게서 보상받고 있는 듯 행복했다. 

주희는 박노인을 잘 따랐다.
 
엄한 엄마, 아빠에게 혼이나면 그 치거리를 다 풀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 노인인 까닭이리라. 

고액과외, 무용, 피부관리 등. 며느리는 온갖 것을 주희에게 다 시켰다.
 
주희는 그럭저럭 그 욕심을 따라갔고, 매번 부모를 만족시켰다. 



주희가 16살 되던 해, 박노인은 손녀딸을 보면서 종자가 틀리다고 생각했다.
 
막일로 일구어낸 집안에서 저렇듯 보석이 피어난 것이라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총명한 머리는 박노인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주희가 18살이 되자, 손주의 뒤를 따라오는 남학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집앞 대문에서 서성거릴 때면 박노인은 바가지에 물을 담아 창문으로 내끼얹어 녀석들을 쫓아버리고는 했다. 

어릴적부터 며느리가 짜놓은 엘리트코스를 밟아온 손녀딸은 이미 또래아이와는 격이 달랐다. 



대학은 그쯤되면 서울대. 

문제는 법과에 진학할것이냐, 의과에 진학할 것이냐. 아니면 외국으로 가서 정규 어학코스를 밟을 것이냐. 

매일 영양사가 짜주는 식단에 트레이너가 지시하는 운동요법, 스트레칭으로 다져진 외모는 수려했다.
 
늘씬한 몸에 작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그야말로 가문의 빛이었던 것이다.
 
그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손주가 제일 애교를 부리는 상대는 바로 박노인이었다. 

꽉 막힌 부모말고, 쉽게 터울진 친구 한명도 없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다.
 
집안에서 없는 사람취급받는 박노인이었지만, 주희는 그렇지않았다. 

어깨안마며, 등 안마며... 학교를 갔다오면 무슨일이 있었는지 조잘조잘 할아버지에게 고해바치곤했다.
 
한 시간 정도 있으면 과외시간이라고 며느리가 소리를 지르고 

주희는 입술을 뾰로퉁히 내밀고 박노인에게 '잘 자 할아버지' 하고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우리 손주가 최고여!!”

학교 체육대회때 나간사람도 박노인이 전부였다.
 
주희는 부모님은 찾지도 않고 냉큼 할아버지 곁으로 달려와 환히 웃었다. 

“너 이거 봐! 이거!”

주희는 팔짝팔짝 뛰면서 손등을 내밀어보였다. 

1등이라고 적힌 푸른색 도장자국이 보였다. 

“어이구! 우리 주희는 멀하든 1등이여, 1등!”

마냥 너털너털 웃는 할아버지에게 손도장을 자랑해보이는 손녀딸의 모습이 생생했다. 










“박 구정 할아버지?”

“아, 예?”

“링겔 맞을시간이세요. 팔 걷으시구요.”

박노인은 팔을 걷어붙이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형편없는 인턴이 링겔을 놓는 까닭에 오늘도 서너번은 더 찔려야할 것을 예감했다. 

시퍼런 바늘침이 팔을 꿰뚫었다. 



박노인은 깼다. 

목이 말랐다. 

간병인은 없었다. 

며느리도 오전에 집으로 돌아갔다.
 
텅빈 병실에 노인 혼자였다. 

며칠전에 같은 병실을 쓰던 이가 죽고나서는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노인은 상체를 일으켜고 주전자에서 물을 따랐다.
 
물병에 물에 왠 남자가 서있는 것이 비추어보였다. 



“누, 누군겨!”

검은 정장을 입은 파리한 남자였다. 

얼굴이 마냥 허앴다. 후리후리한 몸인데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침대 바로 옆에 서있는데도 방금 보았다. 

마치 그 자리에서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은연중에.

방 안이 어두운데도 남자만은 기이할정도로 잘보였다. 깊고 침중한 눈매. 움푹들어간 뺨까지. 



“박구정 씨?”

“그.. 그렇소만요?”

남자는 까만 노트를 한권 품에서 꺼내더니 몇 페이지 넘겼다.
 
그리고 한 대목에 멈추었다. 

노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눈이 별안간 위로 솟았다. 

희번뜩거리는 눈동자가 박노인을 주시했다. 

“오늘, 영감님 데리러 왔습니다.”

박노인은 양손으로 침대보를 꽉 잡았다. 

“저승사자십니꺼? 그렇슴니꺼?”

“영감님, 당신은 오늘 뒤질 상이고 그래서 내가 왔다는거 아닙니까. 아직도 한복에 갓 써야만 분위기가 옵니까? 저승사자 맞아. 그만 가자고요.”

“저는 아직 못갑니더! 아직은 못가예!”

검은정장을 입은 남자는 은색 금속 시계를 한번보더니 한쪽 입가만 올려 웃어보였다. 

“영감님.. 더 살아서 뭐할라구요? 며느리한테 구박받지, 아들은 당신한테 관심도 없지.
 
온 집안내에서 귀찮은 늙은이라는 딱지붙여놓은지가 얼마짼데... 그래도 더 살고 싶어요? 응?”

순간 박노인의 뇌리에 며느리의 한숨과, 자신을 본체만체하는 아들... 

집안 가정부의 우습다는 시선, 며느리집 식솔들의 경멸하는 눈초리가 생각났다. 

온몸에 힘이 주욱 빠졌다. 별 수없이 따라가야겠다 싶었다. 이런 세상이라면.... 



그 때 별안간 박노인에게 한가닥 홧기가 일었다.
 
죽기직전에 몰리자 자신을 등한시하던 모든 것들에게 치밀어오르는 분노였다. 

“으아이구! 이런 씨펄! 며늘아는 시아버지한테 예가 없고!
 
아들내미는 등골 부서뜨리카며 일해서 대학보내 줬더니 본체만체카고! 

뭐가 잘나서 친댁 새꾸들은 눈을 홉뜨고 보고! 내 아들 돈 처먹고 일하면서
 
가정부는 날 우습게 보카고! 머고 이기! 내인생 머인교, 잉? 

내 억울해서 이리는 몬가요...! 내 이것들 다 잡아 족치지않구선 도저히 못죽습니더!”

바닥에 주저앉아 씩씩 거리는 박노인을 보던 저승사자의 눈빛이 순간 반짝였지만, 노인은 눈치채지 못했다. 

“뭐 영감님 뜻이 정그러하다면 한 3년 말미를 더 줄순 있는데...”

박노인이 벌떡 일어났다. 

“머인교? 지발 좀 부탁인기라.. 저 좀 살려주십시예.
 
죽도록 일하고 구박받은 죄밖에 없습니다예... 인생에 즐거운 일, 웃은 일이라고는 통 없어예!”

“영감님 손녀딸있지요?”

“예... 갸가 억수로 영특합니더”

“그래서 말인데... 저 주면 안될까요?”

“예?”

저승사자는 주변을 훼훼 둘러보다가 말했다. 

“사실... 영감님 댁에 개 한놈 죽은 일 있지않습니까?”

박노인은 눈을 껌벅였다. 1년전, 주희가 기르던 애완견 마르티스가 죽은 일이 있었다.
 
주희가 하루종일 울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 개 영혼을 거두려고 제가 그 집에 갔었는데... 왠 여자애가 울고있지않겠습니까?
 
그 모습이 하도 고와서 그럽니다. 영감님 손녀딸이 맞지요?”

박노인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군요! 손녀딸이랑 저랑 엮어도 좋다고 허락만 해주신다면! 바로 3년 말미 더 드리겠습니다.”

그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저승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모자라보이셔서 그렇습니까? 이렇게 사람 영이나 거두러다니는 것 같아서 능력없는게 아닙니다 어르신. 

저승계에서 저처럼 젊은 사자는 그렇게 많지않습니다. 아주 능력있는 축에 속하지요. 

생전에 도량과 덕을 쌓고 죽어 재물도 풍족하구요. 지금 사자 업무를 보고있어 인망도 좋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풍채가 어딜가도 부족하진 않습니다 어르신.”

그도 그럴것이 정장을 쫙 빼입은 사자의 모습은 당당했다. 키도 컸고 몸이 단단해보였다. 

피부가 지나치게 하얗고 뺨이 움푹한것을 빼면 얼굴도 잘생겼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주희를?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녀딸, 주희를? 박노인의 핏대가 굵어졌다.
 
앙상한 손마디가 꽉 주먹쥐어지고 바르르 떨렸다. 

붉으락 푸르락 달아오르는 노인의 얼굴을 사자가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박노인이 고함을 지르기 1,2초 전에 사자가 입을 열었다. 

“열네살에 가출... 그때부터 부두 막노동을 시작했고.. 스무살에 해변 사창가에 있던 계집애를 데리고 도망... 

어이쿠, 그때껏 모은돈 사기로 죄다 날리고... 아드님이 태어나셨네요? 아무튼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다시 막일.. 

그냥 오로지 일, 일, 일이군요. 그 나이되도록 어디 제대로 여행한번 간 적 없으시고... 집에서 대우받는것도 아니고 말이지요.”

노인의 안면이 다른 색으로 붉게 물들었다.
 
얼굴을 달아오르는데 속은 얼음 한조각이 파고든것처럼 차가운 파문이 일었다. 

“손녀딸 주기 싫으시면 관두셔도 됩니다. 저야 하나도 아쉽지않다고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이토록 할아버님께서 완고하시다면야. 대신, 제가 하나 알려드리자면 할아버지 편하게 못돌아가십니다.
 
고생만 죽어라 하시고 삶의 낙이라곤 한 점 없으셨지요? 

안타깝게도 12시간 반동안 사경을 해매시다가 가십니다. 하여튼 안되는 사람들을 죽을때도 박복이더라고.”

멍하니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 박노인이 털썩 매트리스에 앉았다. 

사자는 그 모습을 보며 쯧쯧 혀를 몇 번 찼다. 



노인의 관자놀이가 불룩불룩했다. 

자신의 인생은 무어란 말인가?
 
지나가는 개조차도 자고싶으면 나무 그늘에 드러누워 코까지 골아가며 잔다. 

이 나이되도록 제대록 쉬어보지도 못했고, 놀이나 여가따윈 남일이라 여기며 살았다.
 
기껏 키워낸 아들놈 덕을 보기는 커녕 짐짝 취급을 받으며 산다.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사자가 검지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노인은 암울한 기분으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자, 어르신. 생각해보시면요. 전~혀 나쁜 계획이 아니라는 걸 아실겁니다. 

제가 부족한 놈이고 못난 놈이라서, 손녀딸이 아까우셔서 그렇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저 능력있는 놈이고 남자다운 놈입니다. 

절대 주희씨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이 있는 놈이라구요. 이 문제는 왈가왈부하지말고 넘어갑시다. 

3년수명을 드리고나서, 그 즉시로 작은 복권도 하나 당첨되도록 조처하겠습니다. 1억정도면 되겠지요? 

그걸로 그 불쌓한 여생도 좀 위로해보라~ 그겁니다. 아 왜 있잖습니까. 여행도 가보시고, 맛난것도 잡수시고.. 

아무것도 안한 당신 인생을 보살피는게 뭐 그리 나쁘답니까?”

박노인은 TV에서나 보던 하와이의 해변에 흰 선탠 체어에 앉아 햇볕을 쬐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가만히 눈알을 굴리는 노인을 보고 고민하고있다고 생각한 사자가 다시 말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주 파격적으로!, 가실때도 고통없이! 주무시면서 그냥 가도록 해드리지요”

“.... 댁이랑 결혼하면 우리 주희는 어떻게 되는 기라예?” 

사자가 반색을했다. 

“저랑 살게되는 거지요! 아, 물론 표면적으로 보기엔 죽을겁니다... 하지만 그건 이승에서의 죽음일 뿐이지요. 

저승에서 제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는 겁니다.”

“헌데... 왜 내게 허락을 받으려는기요? 손주는 양가부모도 멀쩡히 살아있는데다 본인도 멀쩡한데...”

“그것이... 원래 사자가 산 사람을 반려자로 맡기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장 신뢰하는 손 윗사람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개인의사랑은 상관없지요. 저승에서는 아직도 유교가 뿌리깊은 생활원칙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리타분한 건 아니지요. 현대세상이랑 똑같습니다. 다만 혼례가 의례같은 문제는 아직도 전통적인 법칙을 고수하고 있지요. 

... 이말은 비밀인데, 저승에서 요직인 사람들. 흔히 저같은 사자나 명부서기들은 다 산 사람중에서 반려를 찾는다니까요? 

요새 매스컴에 나오는 연예인이나 가수, 영화배우들 외모가 얼마나 출중합니까?
 
다만, 상제님께 걸리면 바로 모가지라 다들 조심조심해서 눈에 띄지 않는것뿐이지요.”

사자는 주변을 휘휘 살피더니 귓가로 가까이와서 말했다. 

“저도 우연히 영감님 배정이 되어서 그렇지.. 안그러면 꿈도 못꾸었을 겁니다.
 
일반 사자가 담당인 사람도 아닌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는건 바로 사퇴감이니까요.”



박노인은 솔직히 감탄했다. 

그냥 허망하게만 생각하던 죽음이 끝이 아닌것이 묘하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저기... 내는 죽으면 우뜨케 됩니꺼?" 

사자가 바로 얼굴을 굳히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사후 일은 제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상제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하지만 제가 살짝 귀뜸해드리자면, 영감님은 저승에서도 좋은 집, 부유한 삶은 무립니다. 쌓은 덕망이 너무도 얕아요. 

덕망지수가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사후 삶을 살지요. 악행을 했다면 바로 지옥도로 떨어지구요. 

덕망도가 일정 이상으로 높아지면 선한 영으로 인정받아 아주 사후계에서 살게되는 것이구요. 

영감님은... 대충 60년 정도 사시다가 다시 환생을 하시겠네요.” 

환생이라는 말에 벌써 치가 떨렸다. 다시 이런 꼬락서니로 태어날 것 같아 무섭기 그지 없었다. 

“좋습니더, 그렇게... 하겠십니더.”

남자의 여윈뺨이 씨익 움직였다. 

“후회안할 겁니다, 영감님. 주희씨가 시키는 건 뭐든 다하겠습니다. 맹세하지요.”

사자는 사라졌다. 










주희가 갔다. 

아들과 며느리는 반 실신하여 영정을 붙잡고 뒹굴었다.
 
박 노인만 멍한 표정으로 장례식 내내 조문온 사람들을 맞았다. 

방법이란게 참 웃겼다. 

사람이 급진적으로 죽는 길은 쌔고 쌨지만, 하필이면 교통사고여야했을까. 

그것도 차 기종이 중량 4t짜리 화물용 트럭이어야만 했을까. 

주희를 붙잡고 트럭은 백여미터 가량을 더 달렸다고했다. 

덕분에 주희의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관에 온전히 육신을 담으려면 칫솔로 아스팔트 위를 싹싹 긁어모아야할 판이었다. 

찌꺼기를 그러모아도 사람 꼴은 절대로 못된다. 

박노인은 과일쥬스잔에 담긴 손자를 생각해보았다. 

그런 마당에 무얼할까. 7매듭도, 염도 모두 생략되었다. 



값 비싼 오동나무 관안에 주희는 없었다. 

주희가 좋아했던 옷가지만 들어있었다. 

박노인이 사준 파란색 원피스를 주희는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이제, 다시는, 못입을 것이다. 

노인은 엎어버린 영정 사진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깜깜한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중앙일보 데일리 뉴스] 

5월 17일자 

당일 낮, 당첨된 복권의 지급액을 찾아가려던 노인이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차후 확인 결과, 복권에 씌어진 자필 번호는 1등인 '34, 546, 134, 244, 2, 442'와 

일치하여 여러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주고 있습니다. 

당첨 금액을 지급하던 은행 앞 CCTV에 녹음된 테입을 확인 결과, 

사고 원인은 운전자의 졸음 운전인 것으로 판명되었... 



[중앙일보 데일리 뉴스] 

5월 20일자 

당일 낮, 강남구측의 고급 맨션에 방화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안에는 몇일 전 사망한 딸의 장례문제로 의논하는 일가족이 모두 모여있었고, 안타깝게도 이들 모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강남 강력계 형사지부는 최근 사회 고위층과 부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한 무차별 방화가 잦다고 지적하면서,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습니다. 다음으로... 










장례식이 결혼식으로 바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노인은 손녀딸의 팔짱을 끼고 웨딩스텝을 걸었다. 

신부 객석에는 사람들이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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