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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1.10.02 22:40

창귀

조회 수 2117 추천 수 2 댓글 1


새벽 1시. K여고의 3층짜리 제2기숙사의 창문은 소등시간이 지나서 모두 검게 죽어있었다. 그러나 주의깊게 관찰하면 검은 커튼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지상과제에 모든 것을 걸은 공부벌레들이 스탠드를 켜고 몰래 공부를 하는 표시였다. 엄밀히 말하면 교칙위반이었지만 관리사감도 이 정도는 알면서 모르는 척 속아주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매년 S대를 30명 이상이나 보내는 명문 사립여고의 위상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학교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전체학생 300여명 중에서 반수가 넘는 170명 정도가 2개의 기숙사로 나뉘어서 생활을 했다. 집이 먼 학생은 교통시간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한달 기숙사비 80여만원을 기꺼이 납부했고 집이 가까운 학생은 기숙사의 스파르타식 분위기가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그랬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의 개수는 3충에서 1층으로 내려오면서 점점 많아졌다. 3층은 1학년이 2층은 2학년이 1층은 3학년이 사용했다. 3학년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시간마저 아껴서 공부하라는 학교 측의 자상한 배려였다. 

1층 입구에서 왼쪽으로 꺽어진 복도의 맨 마지막 방문에는 3학년 A반 서유진이라고 적힌 푯말이 붙어있었다. 유진은 컴컴한 방에서 짙은 와인색 교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있었다. 방금 전까지 컴퓨터를 사용했었는지 단정한 책상위에 놓인 컴퓨터 화면에는 아직 푸르스름한 형광기운이 남아있었다. 살결은 유난히 창백해서 어둠속에서도 갸름한 얼굴과 배위에 포개 모은 손의 모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치렁치렁한 머릿결이 푹신한 배게위에 해초처럼 흐드러져 있었다. 사감 몰래 야식이라도 먹으면서 음악을 듣는 중일까. 유진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볼을 우물 우물 거렸다. 뭔가를 입에 가득 물고 있었다. 갑자기 불컥 하며 한줄기 빨간 핏줄기가 유진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점심시간. 교실은 서로 모여서 밥은 먹는 아이들로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급식으로 나오는 반찬은 모두 똑같아서 반찬을 나눠먹는다는 의미는 없었지만 점심시간의 한바탕 수다는 수험생들이 쌓인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배출구였다. 텔레비젼 50대를 동시에 틀어놓은 것 같은 떠들썩함 속에서 교탁 바로 앞에 놓인 하나의 빈 책걸상이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일주일전에 기숙사실에서 혀를 깨물고 자살한 서유진의 자리였다. 일주일 만에 잊혀진 한 생명처럼 무관심속에 시들어들어버린 국화꽃한송이가 유리컵에 꽃인 채 초라하게 고개를 꺽고 있었다 . 

유진과 같은 A반인 3학년 미술부장인 최은미는 스티로폼 용기에 포장된 급식도시락을 들고 5층 미술부실로 올라갔다. 170cm정도 되는 큰 키에 깡마른 체형이었다. 미간에 세로로 그어진 두개의 주름은 신경질적인 성격을 말해주었다. 덜컥..부실문을 열자 3학년부원 박선주는 책상을 두개 붙여놓고 벌써 도시락을 까먹고 있었다. 언뜻 언뜻 보이는 회색 치아교정기사이로 밥풀과 나물이 끼어있었다. 급식도시락 옆에 코리끼 밥통이 또하나 놓여있었다. 80킬로가 넘는 선주의 몸을 유지하기에 학교급식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3월의 게으른 햇살이 창문을 통해 뿌옇게 쏟아져 들어왔다. 오랫동안 부실 청소를 하지 않았서 여기저기 널린 이젤과 졸업한 선배들의 그림을 담은 액자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은미는 부유하는 먼지에 밥맛이 떨어지는지 신경질 적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연락 없었어?" 
은미가 낡은 의자를 끌어다 선주 앞에 마주 앉으며 물었다. 
"누구한테?" 
"경찰한테서 라든지 선생들한테.." 
"없었어. 전혀 눈치 못챈 거 같애." 
"주영이년한테는?" 
"나랑 지선이가 불면 죽여버린다고 말해뒀어. 절대 못 꼰질러. 우리가 어떤 얘들인지 알고 있으니까." 
"..서유진..씨발년, 왜 죽고 지랄이야" 
은미는 밥을 두어 숟갈 뜨다말고 영 입맛이 없는지 한쪽으로 밀쳐두고 치마 주머니에서 디스를 한 개피 꺼내 물었다. 선주는 은미의 눈치를 보며 남긴 밥을 슬며시 당겨서 퍼먹었다. 

은미와 선주, 지선은 소위 말하는 '일진'이었다. 어느 학교에나 집단으로 약한 사람에게 힘을 과시하려는 무리들은 있게 마련이고 사립명문 S여고도 예외는 아니었다. 셋은 형식상으로 미술부원이었지만 이제껏 원뿔뎃생한장 그려본 일이 없었다. 단순히 선생들의 터치 없이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거나 할 수 있는 부실이 탐났을 뿐이었다. 꽤 전통이 있던 미술부도 은미네가 휘어잡은 이후로 부원들이 빠져나가서 현재 실재인원은 이들 3명에 불과했다. 5층에 가건물용 스티로폼판넬로 지어진 부실은 선생들이 거의 간섭하지 않아서 약해보이는 후배나 친구들을 불러다가 괴롭히는데는 제격이었다. 특이한 것은 은미네 멤버들의 성적은 명분여고에서도 모두 상위권이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리더인 은미의 어머니는 후원회장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패거리에 대해 학교에서 좀 안 좋은 소문이 돌아도 선생들은 여느 불량학생을 대하듯이 막 대할 수가 없었다. 그네들의 폭력은 인생 막 가는 식으로 망가진 아이들의 폭력이 아닌 단지 수험생활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폭력이었다. 그럼에도 은미패거리는 그 잔인한 정도가 심했을 뿐만 아니라 보복에도 철저했다. 

언젠가 은미패거리에게 집단괴롭힘을 당하던 동급생 한명이 지도부선생에게 신고한 적이 있었다. 지도부선생은 은미, 선주, 지선을 한명씩 불러서 대질 심문을 시켰다. 당연히 밀고자는 얼어붙어서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고 지도부선생은 사건을 친구들 사이의 단순한 다툼으로 생각해버렸다. 결국 은미네에 대한 징계는 간단한 훈계와 반성문 5장으로 끝났다. 물론 밀고자에게는 다음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 이 소문이 퍼진 이후 학생지도부실 신고함에 쪽지가 들어오는 일은 사라졌다. 교장은 학교가 평화롭게 돌아가는 증거라며 몹시 흡족해 했다. 
"후우..지선이 이 쌍년은 왜 아직도 안와" 
은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은미는 화들짝 놀라 담배를 선주의 도시락에 비벼껐다. 어..어..?하며 선주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부실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아닌 지선이었다. 은미가 울컥 짜증을 냈다. 
“뭐야 씨발, 선생인줄 알았잖아” 
지선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나..나..어제밤 받았어..편지.." 
"편지? 뭐야 그게?" 
"이메일...유진이 보낸...오..오늘밤 나를 찾아온대.." 
지선의 짧은 치마 밑에 드러난 하얀 다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미친년아 울지만 말고 제대로 말해봐. 이메일에 뭐라고 적혀 있었는데?" 
은미가 닥달을 했다. 
"어흑 흑..나..날 죽인다고했어..걘.. 일주일 전에 죽었는데 도대체 누가..흑..무서워..무서워..밤마다 유진이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 매일 밤마다!" 
"지랄하네. 그년이 죽기전에 예약발송한거야. 죽어서라도 우리한테 찜찜한 기분이 들게 머리 쓴거라구. 쫄지마 이 병신아" 
은미는 담배에 새로 불을 붙이며 이마를 찡그렸다. 

방과후. 김아영은 목에 카메라를 건 채 유진의 기숙사방을 거닐었다. 156cm정도되는 아담한 키에 짧게 커트한 머리가 발랄해 보이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아영은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가끔 탐정처럼 흐음-하는 소리도 내가며 방안을 유심히 관찰했다. 짙은 와인색 교복자켓 왼쪽 가슴에는 '교지편집부'라는 녹색 뺏지가 달려있었다. 이를테면 기자라고나 할까. 아영은 교내신문편집부의 3학년 부원이었다. 유진의 방은 사건 이후로 출입금지령이 내려졌지만 빌려줬던 교과서를 찾아야 수업을 한다는 핑계로 관리실에서 열쇠를 받아낼 수 있었다. '사건 사진촬영좀 하게요'라고 솔직함의 미덕을 발휘했다면 어림도 없을 일이었다. 아영은 벌써 변칙과 수완을 적절히 구사할 줄 아는 어른스러움-좋게 말해서-이 있었다. 

계간으로 나오는 교내신문에 평소 실리던 내용은 누구누구가 백일장에서 상을 탓다더라 학년수석 누구가 전국모의고사에서 전국등수 10등 안에 들었다더라 정도의 재미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적어도 자살사건인 것이다. 말하자면 특종이었다. 대학도 신문방송학과로 가서 정식 기자가 되겠다고 일찌감치 진로를 정한 아영에게 이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반이 달라서 죽은 유진이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구의 불행을 신문기사감으로 취급한다는데 아영은 내심 미안했다. ‘난 남의 불행을 기사로 써내기엔 너무 소심한 것 아닐까?’ 하고 아영은 혼자 생각해 보았다. 

유진의 책장에는 교과서 외에도 초능력이나 최면술에 관련된 유치한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특히 최면술에 관련된 책은 시중에 나와있는 것을 모두 수집해 놓은 거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고3이면 최면술이나 오컬트따위에 빠져있을 나이는 훨씬 지났는데..아영은 잠시 고개를갸웃거렸다. 책장 바로 옆에는 아이보리색의 싱글침대가 붙어있었다. 자살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이나 지났지만 침대보에 얼룩진 핏자국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영은 그때의 광경이 떠올라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영은 기자의 특권을 이용해서 경찰들 틈바구니로 유진의 죽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참했다. 입속 가득히 잘게 토막난 혓조각이 쑤셔박혀 있었다. 침대는 피로 흥건하게 젖어 쇠냄새가 섞인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아영은 구역질을 참지못하고 화장실에서 그날 아침에 먹은 걸 모조리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아무리 마음을 독하게 먹었기로서니 자기의 혀를 저지경이 되도록 태연히 씹을 수가 있단 말인가. 더구나 유진의 표정은 살짝 흡족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흡사 실컷 포식을 한 후의 만족같은 미소는 오히려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아영의 커다란 눈동자가 뭔가를 발견하고 반짝 빛났다. 워크맨이었다. 엠피쓰리 플레이어나 씨디피도 아닌 시대에 뒤진 테이프플레이어였다. 그러고 보니 아영이가 막 죽은채로 발견되었을 때 침대보 위에 워크맨과 이어폰이 뒹굴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뭔가를 듣고 있었다는 뜻이다..찰칵..아영은 조심스럽게 워크맨을 열고 안을 확인해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이 증거품으로 가져갔을까? 그럴리는 없다. 그럴거면 워크맨도 함께 비닐봉지에 넣어서-영화에서 보듯이-보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찰이 발견했을 당시 이미 안에 테이프가 없었다는 뜻이 된다. 뭔가를 듣고 있었지만 안에 테이프는 없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영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졌다. 

아영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책상위의 컴퓨터로 옮겨졌다. 17인치 LCD 모니터 옆에 ‘미술부3학년 주소록’이라고 적힌 소책자가 놓여있었다. 아영은 그것을 가만히 집어들고 차라락 훓어보았다. 지금은 몰락하다시피한 미술부의 부원명부였다. 부원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 그리고 이메일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었다. 그중에서 아영은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김아영. 자신의 이름이었다. 아영이도 1학년때까지는 미술부원이었다. 그림실력은 없었지만 아직 교지편집부쪽으로는 흥미가 끌리지 않았기에 형식적으로 가입한 부서였다. 그때 동기 중에 최은미라는 아이가 있었다. 한때 이메일도 주고 받으면서 친하게 지내던 아이였다. HR시간에 나란히 앉아 개발새발로 그려놓고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났다. 얌전하고 내성적인 아이였는데 어찌된 셈인지 2,3학년을 지나면서 점점 난폭해 져서 이젠 친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반도 달라지고 들리는 소문도 안 좋고해서 아영하고도 뻘쭘한 사이가 되었다. 

문득 아영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방문 앞에서 한 여학생이 서서 아무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깨까지 늘어진 치렁치렁한 머리에 주황색 촌스런 실내복 차림이었다. 1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C반의 문주영이었다. 평소 말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어딘지 모르게 기분나쁜 아이였다. 1학년때부터 어울리던 친구는 죽은 유진이 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슨 일인지 반년 전부턴 소원해 져서 이젠 친구가 없다시피 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던 것일까. 내가 행동하는 걸 계속 지켜보았을까? 아영의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쫘악 흘렀다 
"아..안녕 주영아 여긴..무슨..일..?" 
지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눈을 흘기며 뒤돌아갔다. 어디선가 흑흑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이 아니었다. 

"얘들아 얘들아 들었니?" 
"또 지선이 죽은 얘기?" 
"어저께 자기방에서 자살했다며? 유진이랑 똑같이 혀를 잘근 잘근 씹어서." 
"근데 옆방에 있는 얘들이 그러는데 저녁 내내 우는 소리가 들리다가 밤 1시쯤 되서야 그쳤다는데 경찰이 알아보니 그때 죽었다더라 아우 소름끼쳐" 
"벌 받은 거야 그 나쁜 년들. 평소에 유진이를 그렇게 괴롭혔으니..쌤통이다" 
"근데 졸라 웃기지 않냐? 걔가 왜 자살을해? 유진이가 지들땜에 죽었다고 양심을 가책을 받을 년도 아니고" 
"소문 못들었냐? 죽은 유진이가 귀신이 돼서 복수를 하고 다닌데!" 
"어유- 유치하긴 빙신아 그게 말이 되냐?" 
학교는 온통 어젯밤에 자살한 지선이의 이야기로 술렁거렸다. 유진이 자살한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더구나 죽은 방법이 일주일전 유진이가 죽은 방법과 동일했다는 것이 온갖 기괴한 상상과 소문을 낳았다. 유진이 자살한 이유는 은미네 패거리의 괴롭힘 때문이었다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교장은 대외적인 학교 이미지 때문에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서 비관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평소에 딸에게 관심도 없던 유진이의 부모를 빼고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아이는 없었다. 

아영은 학원폭력과 연쇄자살사건의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책임감을 느꼈다. 아영은 평소 실력은 있지만 끈기가 부족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태권도 유단자였지만 항상 겨루기에서 처음엔 몰아붙이다가도 마지막에 느슨하게 해서 역전패를 당하고 했다. 오래달리기 시합을 해도 처음 한바퀴는 1등으로 돌고 다음 바퀴부터는 걷다시피 해서 결국 꼴찌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번만큼은 다르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진상을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아영은 다짐했다. 


'야 기자아가씨! 수학 노트좀 빌려줘라" 
부반장인 주희가 쉬는 시간을 틈 타 자고 있는 아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영은 이마에 굵은 매직으로 '짜 증'이라고 쓴 듯한 표정으로 부스스 일어났다. 
"넌 무슨 얘가 부반장이 되갔고 숙제도 안해오냐?" 
"너야말로 같은 반 친구가 죽었는데 잠이 오냐?" 
"안그래도 그 문제로 생각할게 많아서 머리가 복잡하단말야. 참 너 2주전에 빌려간 영어참고서도 그냥 먹었잖아" 
"맞다, 그거 주영이가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었는데 잊고있었네" 
"주영이? C 반 문주영?" 
"응 왜 좀 기분나쁜 얘 있잖아. 저저번주에 빌려달라는 걸 거절하기도 꺼름칙해서 그냥 빌려줬어. 지난 주 월요일날 새벽 1시 좀 넘어서 찾으러 갔었는데 방에 없길래 그 이후로 까먹었어" 
주희은 혀를 빼곰 내밀며 뒷통수를 득득 긁었다. 건망중에 방향치에 덜렁뱅이. 이런 얘가 어떻게 부반장에 뽑혔을까. 아무리 생각이 없기로서니 자기가 빌린 책을 남한테 또 빌려주다니. 

"새벽 1시? 그 시간에 남의 방에 가는건 어느나라 예의냐?" 
"바보 , 고3이 새벽2시에 자는 건 기본이지. 1시에 찾아가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런가? 12시 취침 7시기상의 새나라의 어린이인 아영은 친구들에게 뒤지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찜짐했다. 잠깐만! 아영의 커다란 눈동자가 순간 반짝 빛났다. 
"가만, 지난 주 월요일? 유진이가 자살한 날이잖아?" 
"어?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 으악! 그럼 난 유진이가 죽을 때 복도를 막 돌아다녔단 말이야?" 
주희 흥분해서 혼자 뭐라고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아영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 새벽 1시라..그 시간에 기숙사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수도파이프가 고장나서 1층의 화장실은 사용불능이었다. 다른 방에서 수다를 떨다 걸리면 즉시 정학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주영이는 어디에 갔을까? 주영이의 유일한 친구가 유진이었다는 사실이 퍼뜩 떠올랐다. 아영의 머릿속에서 주영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유진의 방과 겹쳐졌다. 그 순간 아영의 머릿속에는 수맣이 흩어진 퍼즐 조각중 최초의 두조각이 똑딱! 소리를 내며 맞추어졌다.. 

방과 후 학교 옥상.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늘어서 있었다. 하나는 가로로 펑퍼짐했고 하나는 세로로 늘씬했다. 
"으..은미야..지선이 말이 사실이었어. 유진이가 죽어서 복수하고 있는거야! 으흐흐흑 " 
선주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뒤룩뒤룩한 볼살은 눈물로 허옇게 터있었다. 
"어젯 꿈속에서 지선이의 목소리가 들렸어..오늘밤 날 찾아온다고 했어..나..나도 죽을 거야..그 다음엔 너도 죽을 거구!!!혀를 잘근 잘근 씹은 채로!!!" 
"닥쳐 이 돼지같은 년아!" 
철썩 철썩- 
은미가 선주의 뺨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선주의 치아교정기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맷혔다. 
'도대체 누구지? 누가 유진이 대신 나서는거야? 설마..주영이가?' 
이 와중에서도 은미의 머리는 합리적인 방향으로만 돌아갔다. 귀신따위 있을 리가 없다. 
"시..실은.나..나도 받았어 ..그 메일.." 
선주가 빨갛게 부은 뺨을 어루만지며 울먹였다. 
"말했잖아 병신아! 그건 유진이 그년이 예약발송한 거라고! 언제까지 유치한 불행의 편지에 벌벌 떨고 있을거야!" 
"아냐..틀려..보낸 주소가 지선이 메일이야. 흑.. 어젯밤 12시 50분에 발송됐어.그건 분명히 지선이가 죽기전에 나한테 보낸거야. 으흐흐흑..하..한명씩 한명씩 전염될거야.. 우리가 다른 얘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창귀처럼?" 
"그래...창귀처럼" 

"창귀라고 알아?"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주영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창귀? 뭐야 그게?" 
아영은 기자의 습관으로 재빨리 재킷 안주머니의 녹음기 스위치를 누르며 반문했다. 한사코 싫다고 하는 주영이를 억지로 붙잡아 인터뷰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너는 유진이랑 친했으니까 유진이의 죽음에 대해서 아는대로 말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이 사건을 주요신문사에 제보하겠다고 위협하자 주영은 머뭇머뭇하가 결국 승낙하고 말았다. 어쩐 일인지 유진이의 일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피하는 눈치였다. 자기가 말했다는 것도 꼭 비밀로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창귀란 호랑이한테 물려죽은 귀신을 말해. 귀신은 죽어서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호랑이의 노예로 이용당하지. 창귀는 다른 사람을 홀려서 호랑이의 먹이로 바치고 나서야 자유를 얻고 이승을 떠날 수 있어. 그 다음 창귀도 마찬가지고" 
"흐응..그래서? 그게 이 사건이랑 무슨 사건이 있는데?" 
아영은 전설의 고향을 연상케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끌리지 않았다. 
"은미네 패거리..알지? 걔네들이 바로 그래. 일단 목표로 잡은 아이를 미술부실에서 철저히 농락하지. 이젤을 뜯어서 몽둥이로 만들어 패기도 하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더 만만해 보이면 오줌이나 똥을 먹게 해. 한마디로 미친 년들이야" 
"잠깐! 그럼 유진이가 죽기전까지 미술부실에서 그런 짓을 당했단 말이야? 말도 안돼 그런 걸 어떻게 학교에서 모를 수가 있지?" 
"보복당한 아이를 보았으니까. 장난감이나 다름없이 시키는 데로 오줌도 받아 마셔야하는 노예..웃기지? 그게 바로 나였어" 
"..!!!" 
아영은 충격으로 할말을 잃었다. 

"나도 알아..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수근거리는지..재수없고 기분나쁜 얘라고 하겠지. 나도 그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밝은 성격이었어. 친구관계도 어느정도 자신감도 있었고. 그런데 그게 어느날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던 거야. 이해하려고 하지마. 이건 교통사고와 같은거야. 당하기 전에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해. 자신은 에외라고 생각하니까." 
"..그 후로 1학년 말부터 2학년 1학기 여름방학 전까지 한 반년동안 괴롭힘을 당했어.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 결국 난 견디지 못하고 그 얘들이 원하는대로 했어. 어차피 더 이상 지킬 자존심도 뭣도 없었으니까." 
"..뭘 했는데?" 
"..친구를 팔았어. 가장 친한 친구를. 맞아, 그게 유진이였어. 내가 괴롭힘을 당할 때 다른 아이들은 자기도 휩쓸릴까봐 나를 따돌렸어. 하지만 유진이는 달랐어. 변함없이 내 옆에 있어주고 도와줄 수 없는걸 가슴 아파 했어. 은미패거리는 그걸 노렸어. 우리사이의 신뢰가 깨지는걸 보고 즐거워 했던거야. 괴롭힐 아이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는데 굳이 유진이를 원했어. 나더로 미술부실로 데리고 오라고 시켰지. 그러면 넌 이제 자유라고.. 난..난 결국 시키는데로 하고 말았어..욱..으흐흑.." 
주영은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스스로의 자존감이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인간만이 흘릴 수 있는 비참한 눈물이었어. 
"으흑흑 나도 알아..내 모습이 추하단걸 그렇지만..그렇지만 누구라도 어쩔 수 없었을 거야 그 상황에선!!!" 

주영은 책상에 엎드려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아영은 가슴속이 답답해 지며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나라면..나라면 어떻게 했을까..아영은 스스로의 추한 모습을 직시하기 싫어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유..유진이도 아마 나 못지않게 지독한 꼴을 당했을거야. 그 얘도 반년이상 버티었어. 그러다가 결국 유진이에게 싫증낸 은미패거리는 다른 친구를 배신하라고 요구했겠지. 결국 유진이는 나처럼 비겁해지는 대신 죽음을 택했어." 
"그리고 그 죽음을 도와준 건 너였지?" 
"무..무슨 소리야?" 
주영은 갑자기 안색이 변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아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럼 대답해봐. 유진이가 죽은 그날 새벽 1시에 넌 어디에 있었어? 부반장 주현이가 책을 돌려받으러 갔는데 너는 방에 없었다고 했어" 
"..기..기억안나..아..아마 화장실에 있었을 거야" 
"거짓말! 1층화장실은 공사중이었고 2층화장실로 가려면 내 방문 앞을 지나가야 해. 근데 난 그때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내 신경은 꽤 예민한데도 말야"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때 아영은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 그냥 허세를 부려보는 것이었다. 
"몰라..기억 안나..일주일 전일을 어떻게 확실히 기억하니?" 
주영의 목소리는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넌 그때 유진이 방에 가 있었어. 유진이가 낮에 부탁을 했겠지. 1시에 자살할 예정이니까 그 다음에 와서 '증거물'을 없애달라고" 
"그..그걸 네가 어떻게?" 
앗싸! 걸려 들었다! 이런 걸 두고 유도심문이라고 한다지? 아영은 끝까지 연기를 하기로 작정했다. 

"실은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는데 유진이네 방으로 들어가는 네 모습을 보고 말았거든. 자 이제 나한테도 들려줘. 그 '테이프'를" 
"없어! 벌써 태워버렸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의 내용을 학교에 다 퍼뜨리는 수 밖에" 
아영은 재킷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었다. 조그만 테이프로 기록되는 구식레코더였지만 협박용으로는 그만이었다. 물론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었다. 기자로서의 본능이 어떻게든 사건의 배후를 캐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자 어떡할래? 그 테이프랑 이 녹음테이프를 바꾸지 않겠어? 장난감이었다는둥 오줌을 먹었다는둥의 소문이 퍼지면 아무래도 시집가는데 지장이 많겠지?" 
주영은 배신당했다는 표정으로 아영을 노려보았다. 아영도 지지 않고 마주 노려보았다. 비열하지만 특종을 위해선 할 수 없다. 난 기자가 되기에 결코 소심하지 않단 말이다! 하는 강한 의지를 담은 눈빛이었다. 결국 주영이 체념했다는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기숙사엔 없어. 소지품검사 때 들킬까봐 지난 주말에 집에 두고 왔어. 오늘은 수요일 이니까 주말에나 가져올 수 있어." 
3학년 기숙생들은 평일에는 외부로 출입금지였다. 말도 안돼는 교칙이었지만 부모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어쨌든 대학은 잘 보내는 학교였으니까. 아영은 안도의 안숨을 내쉬며 작은 녹음 테이프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이걸 돌려받고 싶으면 월요일날 테이프를 주면서 자세히 말해줘야 해. 그 테이프랑 유진이의 자살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어제 자살한 지선이와는 또 어떤 상관이 있는지" 
"알았어" 
주영은 묵묵히 대답했다. 

주말이 되기 전에 사건은 한번 더 터지고야 말았다. 3학년 선주가 자기 방 침대 위에서 같은 방법으로 자살한 채 발견되었던 것이다. 시체를 최초로 목격한 옆 방 아이의 말에 따르면 치아교정기 틈으로 잘린 혓바닥 살점이 덕지 덕지 붙어있었다고 했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어갔다. 학생들의 비밀스런 신고와 전후사건을 고려해 볼 때 유진의 자살이 은미네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학교측에서도 파악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왜 가해학생들이 같은 방법으로 연달아 자살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혼자 남겨진 최은미는 극심한 피해망상으로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며칠사이에 얼굴은 시체같이 퀭해졌고 눈동자는 잠시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항상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난 곧 죽을거야’라고 중얼거리고 다녔다. 사건의 심각성을 눈치챈 선생들이 조용히 불러서 심문을 했지만 은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금요일 저녁 은미는 갑자기 아영의 방에 찾아와서 뺀찌를 빌려달라고 했다. 아영이 뺀찌를 건네주며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은미는 대답도 하지 않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자기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은미는 반강제적으로 양호실에 감금되었다. 은미의 집에는 특별자율학습이라고 통보되었다. 은미가 주말에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으면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사건이 수습되기까지 시간을 벌자는 학교측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무사히 주말이 지나갔다. 

아영과 주영이 만난 것은 월요일 밤 12시가 넘어서였다. 연속 3명의 자살자가 나온 후라 학교관리가 더욱 엄격해 졌다. 모 방송사의 사회고발프로그램까지 취재요청을 해올 정도라 학생들의 입막음에도 만전을 기했다. 12시까지 학생들을 자율학습실에 붙잡아두고 그 이후는 무조건 취침시키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던 것이다. 돌대가리들은 이런 일일수록 사건의 원인을 알려고는 하지 않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보이는 관리만 강화하고 자신이 할일은 다 했다고 자위한다. 

주영은 심한 생리통으로 병원에 다녀와야 한다는 핑계로 겨우 집에 다녀올 수 있었다. 아영은 불규칙적으로 들이닥치는 주임의 순찰을 피해 몰래 주영의 방에 숨어들었다.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함은 물론 스탠드도 켜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둘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안에서 후레쉬를 켰다. 아영은 어렸을 때 언니들과 이렇게 이불을 덮어쓰고 귀신이야기를 하던 생각이 났다. 틀린 점이라면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주영은 워크맨의 이어폰을 아영에게 내밀었다. 

"자 이게 유진이가 죽기 직전까지 들었던 테이프야. 네말대로 난 유진이의 부탁을 받고 그 아이가 죽은 뒤 방에 들어가 워크맨에서 빼왔어. 유진이는 아무도 휘말려들지 않게 복수하고 싶어했으니까. 일단 먼저 들어봐. 그리고 명심해. 절대로 중간에 졸면 안돼." 
유진이가 죽어가면서 들었던 소리. 과연 무엇일까. 아영은 떨리는 손으로 이어폰을 받아 귀에 꽂았다. 이어폰에선 다름아닌 유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영의 온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같은 시각 1층 복도 오른쪽 맨 마지막 양호실. 은미는 울다 지쳐 침대에 엎어져 자고 있었다. 지선이와 선주처럼 자신도 곧 죽게 된다는 공포에 질려 근 이틀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자물쇠로 잠긴 양호실문은 은미의 피해망상을 키워주었다. 은미는 가위,칼,주사기등등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치워버렸다. 벽에는 길다란 물체를 열십자로 묶어서 엉터리로 만든 십자가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우웅...안돼..오지마...으음...잘못했어.." 
은미는 잠꼬대를 했다. 한시간 전까지 흥분해서 마구 날뛰던 은미에게 양호선생이 진정제를 주사해서 겨우 잠재웠던 것이다. 벽걸이 시계가 12시 45분을 가르켰다. 갑자기 퍽-소리를 내며 양호실의 미니 콤포턴트의 스피커램프에 빨간색으로 전원이 들어왔다. 콤포턴트의 코드는 뽑힌 상태였다. 곧이어 스피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은 선주의 약에 취한 듯이 나른한 목소리였다. 

-온몸이 무거워진다..너무 무거우서 땅 속으로 몸이 푸욱 파묻힌다... 

따뜻하다...아늑하다..지하로..지하로..몸이 점점 더 내려간다.. 

이제부터 100부터 0까지 천천히 세어가는 동안 당신은 점차 깊은 최면에 빠져든다.. 

백..구십구...구십팔...구십칠... 





...육..오...사...삼..이...일...제로. 

당신은 이제 완전히 깊은 최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할일이 생각난다.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내야 한다. 컴퓨터앞에 앉아서 전원을 켠다...살.아.있.는 미술부원에게 이렇게 메일을 보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이곳은 춥고 어두운 곳이야. 너를 죽여야 내가 안식을 얻게 돼. 오늘 밤 너의 방으로 찾아갈께. 

이제 컴퓨터를 끄고 침대로 돌아가 똑바로 눕는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배에서 꾸루룩 소리가 날 정도로 배가 고프다. 

입안에 뭔가가 느껴진다. 맛있는 스테이크다. 한입가득 씹는다. 약간 질기다. 덜 익었는지 힘줄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맛은 있다. 

다시 한번 힘있게 씹는다. 맛있다. 꿀맛이다. 잘근 잘근 반복해서 씹는다. 입안에 따뜻한 액체가 고인다. 음료수다. 꿀꺽 꿀꺽 마신다 

아 이제 배가부르다. 몹시 만족스럽다. 

영혼이 점점 가벼워 지며 육신을 떠난다. 사방이 어둡고 춥다. 

침대위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 당신은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부터 당신에게 해야할 일이 있다. 

내가 지금껏 당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당신은 메일을 보낸 친구에게 찾아가서 전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당신은 이승을 헤매지 않고 죽은 자가 가야할 곳으로 갈 수 있다. 

치이이이이- 

테이프의 내용은 여기서 끝이었다. 내용은 얼마 안되었지만 매우 천천히 말을 해서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아영은 얼떨떩한 표정으로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이..이게 무슨 내용이야?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어" 
이불 속에서 손전등을 비추고 있던 주영이 대답했다. 
"유진이는 평소에 최면술에 푹 빠져있었어. 걔는 은미네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야. 유진이는 자살하기 전에 죽은 후에 행동해야 할 지침까지 모두 최면 언어속에 프로그램해 놓았어. 죽은 후에도 최면에서 풀리지 못한 귀신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지시받은 대로 해야 하지. 최면이 풀리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그러니까 네 말은 유진이가 자기최면으로 자살을 한 후 귀신이 된 후 지선과 선주를 죽였다는 거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선이만 죽였어. 현재 미술부원이라면 은미,지선,선주 이렇게 셋밖에 없어. 맨 처음 자살한 유진은 귀신이 되서 최면에 걸린 대로 지선을 찾아갔지. 마찬가지 방법으로 자살한 지선은 살.아.남.은 미술부원 중에서 선주를 찾아가서 같은 과정을 반복했던 거야. 그리고 그 댓가로 자신의 영혼의 자유를 얻었을 거야“ 
"이..이건 마치.." 
"그래, '창귀'지. 유진이는 그 얘들에게 당했던 그대로 갚아주고 싶어했으니까. "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최면에 빠질 수가 있지? 나는 이렇게 들어도 멀쩡한데? 더구나 자살 같은 무시무시한 명령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게 될거야." 
"그래서 유진이는 보통 사람들이 잠드는 새벽 1시를 택한거야. 사람이 잠들 때는 무의식이 개방되어 있어서 최면에 걸리기 쉬우니까. 또 '혀를 깨물고 자살해라'같은 직접적인 단어가 아니라 '입안의 스테이크를 씹어라' 같은 우회적인 명령이라면 자살에 대한 심리적인 반발을 최소화 할 수 있어. 내가 최면에 너무 박식하다고 놀랄 것 없어. 유진이가 나한테 테이프를 없애달라고 부탁할 때 다 설명해 줬던 말을 반복하는 거니까. 내가 배신했던 걔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어" 
"도대체 유진이는 무슨 생각으로.." 

아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고등학생이 이렇게 치밀한 살인 계획을 짤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제물을 찾아 돌아다니는 귀신이라니! 주영의 말대로라면 지금 어디선가 선주의 귀신이 남은 재물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살.아.있.은 미술부원은? 
“은미가 위험해!” 
아영은 이불을 열어젖히고 벌떡 일어났다. 

은미가 감금되어 있는 양호실은 기숙사에서부터 운동장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었다. 아영과 주영은 실내복에 슬리퍼 차림으로 가쁜 숨을 내쉬며 운동장을 뛰어갔다. 사감의 눈을 피해 기숙사 창문으로 나왔던 것이다. 아영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12시 55분. 경찰들이 혈액응고검사로 밝혀낸 자실시각은 1시 전후. 주영의 말에 따르면 정확히 1시일 가능성이 높다. 이제 겨우 5분밖에 안남은 것이다. 체력이 약한 주영이 슬슬 뒤쳐지기 시작했다. 아영도 숨이 턱까지 찼다. 기숙사에서 양호실까지는 평소 뛰어가도 10분 가까이 걸리던 거리였다. 어차피 지금 가도 늦을 것 같았다. 그만 포기하고 걷고 싶었다. 
‘안돼! 이번에도 꼴찌가 될 순 없어!’ 
아영은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다. 아영이 양호실 문앞에서 양손으로 무릅을 집고 거친 호흡을 뱉어낼 때 손목시계의 시간은 12시 58분이었다. 최소한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이긴 셈이었다. 아영은 이마의 땀을 닦을 틈도 없이 양호실의 손잡이를 거칠게 돌려서 잡아당겼다.

덜컥 덜컥.. 
문은 밖에서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쇠로 되어있어서 열쇠가 없이는 부술 수 없었다. 시간은 시시각각 멈추지 않고 흘러갔다. 문에 귀를 대어보니 소근 소근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선주의 목소리였다. 아영은 재빨리 손목시계를 보았다. 12시 59분. 시간이 없다! 
“하아 하아..열쇠는..하아..나한테 있어” 
어느새 뒤따라 온 주영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너한..테?” 
“이 문을 잠근 게 바로 나니까.” 
주영의 굳은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서 그 열쇠를 줘! 시간이 없어!” 
“안돼! 너가 뭔데 지금 끼어들어서 방해를 해? 저 년은 받아야할 댓가를 받는 것 뿐이야! 너 따위가..유진이와 내가 겪었던 고통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복수는 은미가 죽어야 끝나. 그래야 공평하다구!” 
“주영아 지금은 은미의 목숨이 위험해! 어서 열쇠를 줘!” 
“못 줘!” 
둘은 엎치락 뒤치락 다투다가 주영이 먼저 복도바닥에 쓰러져 기절을 했다. 태권도 유단자인 아영의 앞차기가 명치에 꽂혔던 것이다. 오늘은 겨루기에서도 이겼다. 
아영은 주영의 손에서 열쇠를 빼앗아 급하게 자물쇠를 열었다. 
철커덕. 
자물쇠가 열리는 순간 아영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1시 정각이었다. 

다음날 아침은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이 밝아왔다. 학교는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어젯밤 4번째 자살자가 생겨났던 것이다. 은미였다. 아영이 양호실에 들어갔을 때 은미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아영의 입 가득히 잘게 씹힌 혓조각이 물려있었고 침대시트는 검붉은 피가 주전자로 부은 듯이 흠뻑 물들어 있었다. 양호실 책상위에는 아영이 빌려줬던 뺀찌와 은미의 어금니가 대여섯개 뿌리째 뽑혀서 나뒹굴고 있었다. 혀를 깨무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이빨을 모두 뽑아버리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양호선생님의 제지로 진정제를 맞고 잠을 자다가 결국 죽음을 맞고 말았다. 아영은 주영이와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와 유진의 테이프를 학교 쓰레기 소각장에 태워버렸다. 이제 유진의 복수는 완전히 끝났다. 사건의 진상은 세상에 알리지 않고 본인만 알고 있기로 했다. 선생님이나 신문사에서 사실대로 믿어줄 지도 의문이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추악한 사건에 연관된 모든 아이들의 프라이버시가 침해될 수 있었다. 역시 아영은 타인의 아픔에 아랑곳 없이 기사를 쓰기에는 너무나 소심한 아이였던 것이다. 사건 이후로 주영과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주영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아영은 친구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주영은 점차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일주일 간의 임시휴교가 끝난 후 학교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도부 선생이 일체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썼을 뿐 악몽은 완전히 끝났다. 따분한 수업시간도 운동장에서 떠들며 노는 아이들도 예전 그대로였다. 수학선생이 칠판에 공식을 쓰는 동안 아영은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유진의 영혼은 지선이 죽은 후에 최면에서 풀려 이 세상을 떠났고 지선의 영혼은 선주가 죽은 후에 최면에서 풀려났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은미의 영혼은 누구를 찾아 헤매야 할까. 지금 이순간도 최면에 걸린 채 목적없이 교실을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녁 9시까지 있는 자율학습이 끝난 후 아영은 기숙사로 돌아와 실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새로운 메일이 한통 와있었다. 발신자를 확인 하는 순간 아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최은미였다. 일주일전에 예약발송된 편지였다. 발송시각 12시 55분. 

- 아영아 안녕. 내가 아는 미술부원 중에 살아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서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이곳은 춥고 어두운 곳이야. 너를 죽여야 내가 안식을 얻게 돼. 오늘 밤 너의 방으로 찾아갈께. 


<끝>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안영준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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