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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2011.06.23 22:44

[소설] 12vs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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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들의 행태를 지켜보는 것은 정말 고역스러운 일이었지만 극한에 다다른 그들의 폭력이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난 5층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영역 밖이었다. 그들도 아파트 복도에서 자신들을 관찰하는 눈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굳이 이곳까지 찾아 올라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마치 '너희가 아니어도 우린 죽일 사람 많아'라고 하듯이 말이다. 덕분에 난(옆집아저씨도) 이렇게 관조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지켜볼 수가 있는 것이다. 단지 리얼한 공포영화를 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자 좀 더 마음이 편해졌다. 나중엔 제법 흥미로운 구석까지도 발견할 수가 있을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복도엔 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의 폭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생기 없는 사람들의 눈동자엔 말초적인 쾌감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한동안 사람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소강상태가 지속되자 그들은 이곳에서 더 이상 사냥감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무리를 지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처럼 찾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쳐버린다는 생각에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들이 막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려는 찰나 회색 승용차 한대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반색하며 다음에 벌어질 폭력적 상황을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꼬리뼈를 타고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싸늘함을 맛보았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느낌을 받은 적도 드물었다. 물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엄마가 아끼던 화병을 깨던 날에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아서 혼나는 일은 없겠지'라는 해방감과 함께 깨진 화병 때문에 쳐 맞게 될 거라는 불안감이 혼재된 기분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습관적으로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 뭐라고 소리치자 그 집단적 광기가 승용차를 향해 쏟아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지상주차장으로 들어오던 회색 세단은 12명의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 휘두르는 쇠파이프 질에 막혀 멈추고 말았다. 아마 나였다면 훨씬 더 저돌적으로 돌진해 그들을 모두 깔아뭉개버렸겠지만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승용차의 주인은 그런 건 둘째 치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얼마나 놀랐는지 시동까지 꺼먹은 상태였다. 엄청난 쇠파이프 세례가 순식간에 고급승용차를 폐차와 다름없이 만들어 버렸다. 그 중 한 녀석이 승용차의 문을 열고 운전자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잔뜩 겁먹은 아주머니였다. 이웃집 아저씨가 담배를 피워 물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더니 한숨처럼 토해내며 말했다.
"내기할까? 두 방에 죽는다에 담배 한 갑."
나에게 하는 말이 분명했지만 지금 내 귀엔 아무런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파란 모자를 쓴 녀석이 이번에도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놈은 쇠파이프를 건들건들 흔들어 대며 겁에 질린 아주머니를 향해 휘적휘적 다가갔다.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미처 어쩔 틈도 없이 놈의 쇠파이프가 여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나는 그걸 보며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쇠파이프가 마치 내 머리통을 후려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파란 모자의 쇠파이프 질을 본 나머지 놈들이 자기들끼리 웃으며 박수를 쳤다. 마치 게임이라도 하고 있다는 식이었다. 내 얼굴은 기이하게 비틀렸다. 순식간에 충혈 된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순식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더 이상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방금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니까.
공황상태에 빠진 나는 무작정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뭘 찾는지도 모른 채 미친 듯이 온 집안을 헤집어 놓은 후에 내 손에 들린 것은 공구함에서 꺼낸 망치와 스패너였다. 옆집 아저씨가 담배를 물고 복도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다가 양손에 연장을 들고 악귀 같은 형상으로 나오는 날 보더니 번개같이 집안으로 뛰어들어 가버렸다. 문이 쾅 닫히더니 잠금장치를 채우는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나는 다시 복도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놈들은 아쉬운 듯 이미 죽은 어머니의 머리통을 쇠파이프로 장난스럽게 꾹꾹 누르고 있었다. 순간 구토가 치밀었다. 나는 아파트 복도에 쭈그려 앉아 한동안 헛구역질을 해야 했다. 아침에 마신 오렌지 주스가 쓰디쓴 위액과 함께 흘러나왔다.
"개새끼들 다 죽었어..."
견딜 수 없는 분노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도저히 놈을 죽여 버리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분노가 내 세포 하나하나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그야말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다. 옷소매로 대충 입을 닦고, 길게 늘어진 복도를 바득바득 따라 걸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화살표 버튼을 거칠게 두 번 눌렀는데 뭐가 문제였는지 엘리베이터는 8층에 딱 달라붙어 도통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때 마침 젊은 여자 하나가 계단을 오르다가 날 보고(정확히는 내 손에 들린 연장을 보고) ‘헉’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여인의 손을 부적처럼 꼭 붙들고 있던 사내아이가 ‘우와 망치다’하며 놀라워했지만 곧 여인의 손에 입을 가로막히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나 계단 아래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런 짓을 하다니 놈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거다. 다 죽여야지. 이젠 정말 다 죽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막 1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야이 개새끼들아. 내 동생 살려내."
그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12명의 청년들을 향해 무모한 돌진을 벌이고 있었다. 녀석들은 우리 엄마만 죽인 게 아니라 저 무모한 남자의 동생도 죽인 것이 틀림없다. 그의 손에 들린 식칼이 제법 흉흉한 기세를 발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쇠파이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파란 모자가 휘두른 쇠파이프 질 한방에 맥없이 꺾이고 말았다. 이에 뒤질세라 또 다른 쇠파이프가 그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그는 괴상한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 하다가 바닥에 꼴사나운 자세로 쓰러졌다. 나는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된 가난한 집 소녀가 자신의 초라한 구두를 내려다보듯 들고 있던 망치와 스패너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꽤나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길이도 짧고, 사람 한명이나 제대로 죽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낡아빠진 연장이다. 그제 서야 조금이나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을 할 수가 있었다. 겨우 이런 것으로 쇠파이프 12개와 맞서려 했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분노 때문에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설쳐대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1분만, 아니 30초만 더 늦었어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아마 내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 순간 30초 늦게 내려왔다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 저 무모한 남자의 광대뼈가 형이상학적으로 함몰되는 것을 볼 때에는 더욱 그랬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은 차라리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한 신의 배려로까지 생각될 정도였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화신이었던 그 남자는 순식간에(정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냥 다진 고기가 되어버렸다.
현실적인 공포와 마주하는 순간 혈관을 타고 빠르게 역류하던 분노는 차갑게 식어갔다. 다진 고기가 되어버린 사내의 시선이 하필이면 내 쪽을 향해 고정되었던 탓에 아파트 복도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관찰하던 난 공교롭게도 그와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때마다 사내의 처참한 몰골에 내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서늘한 한기가 마치 거미처럼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혀를 길게 빼어 물고 죽어 버린 그의 눈이 무슨 조화였는지 한 번 깜빡였을 땐 혼이 빠져나갈 만큼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망치가 바닥에 닿으며 꽤나 시끄러운 소음을 발생시켰는데, 설상가상으로 놈들 중 한명이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숨어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복도 벽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저 망치와 스패너를 꽉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헤비메탈 그룹사운드의 드럼 대용으로 박자를 맞출 수도 있을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다. 물론 진담도 아니다. 아무튼 놈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지척까지 왔을 때 나는 기어코 선택의 기로에 내던져지게 되었다.
사실 선택이란 놈은 그림자만큼이나 집요한 구석이 있어서 어딜 가든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요리경연대회에 초청된 미식가의 혓바닥 돌기세포 같아서 참치초밥이 아무리 맛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안심스테이크에게 손을 들어주고 마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통장 잔고 확인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 선택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선택의 미학이란 거다. 혹 무리를 해서 둘 다 맛있다고 해줄라치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는 법이다. 근데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어쨌거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특히 쇠파이프에 머리통을 얻어맞고 혓바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채 죽는 것만큼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택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맞서 싸울 것인가, 혹은 개발에 땀나도록 도망을 칠 것인가 하는 그 단순 명쾌한 이분법 말이다. 미식가니, 선택의 미학이니 아무리 떠들어 봤자 결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혹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 버리는 간단한 문제였다. 싸워도 좋고, 달아나도 좋다. 물론 난 후자를 선택하기로 진작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지가 후들거리는 통에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하기가 힘이 들었다. 아무리 애써봤자 죽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 망상처럼 두개골을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웬일인지 나는 도망칠 수 있는 모든 시간적 여유를 소진하고 나서도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지척까지 온 놈의 발자국 소리가 멈추는 것과 동시에 아파트 현관문이 오래된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내 심장은 이미 폭주기관차처럼 폭주하고 있었고, 망치와 스패너를 얼마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잡이에 손가락 자국이 다 남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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