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글에 안중근의사 관련글이 있네요..
10월 26일이 다가오네요...
일본에게는 영웅이기도 한 이또히로부미라는 가이스키가 뒈진 날이죠..
https://youtu.be/J0lAE8gFYZg
안중근의사를 모르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이 시점에 이런 글이 어울릴진 모르겠지만.
26일에 뒈진 이또라는 가이스키를 기념하면서 한 번 써보겠습니다.
현재 안중근의사 추모 단체는 한국에 총 3군데가 있습니다.
함세웅신부가 이사장으로 계신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 http://www.greatkorean.org
윤치영이 초대 이사장을 지낸 안중근의사숭모회 : http://www.patriot.or.kr
인기글에 나오는 자전거 타기 주최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 http://www.danji12.com
입니다.
뭐 훌륭한 독립운동가를 저마다 추모하겠다고 나서서 단체를 만드는 일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왜?
왜 이 세단체는 서로 합병하거나 뭉치지 않고 서로의 노선을 걷고 있는걸까요?
왜? 무슨 목적에서?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관해 한번 살펴봅시다.
아래는 시민의 신문 취재부장 정지환님의 글입니다.
숭모회가 설립된 것은 1963년이다.
지난 40년 동안 모두 8명이 이사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시민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 정도를 제외하고 대다수가 친일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역대 독재정권 치하에서 고관대작을 지내며 호의호식한 사람들이라는 일부의 평가가 있다.
숭모회의 역대 이사장을 지내거나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인사들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윤치영: 임전대책협의회 회원(41), 이승만 비서실장(45~48), 내무부장관(48), 서울시장(63), 자유당ㆍ공화당 국회의원(48~71), 5공 국정자문위원(81).
△이은상: 이화여전 교수(31), 친일잡지 <조광> 주간(43), 시조작가협회장(66), 5공 국정자문위원(81).
△백두진: 조선은행 근무(34~45), 족청 재정담당 이사(46), 재무부장관(52), 국무총리(70), 유신정우회 의장(73), 국회의장(79).
△최태섭: 한국유리 회장(57), 크리스천아카데미 이사장(68), YMCA 재정위원장(68).
△정원식: 문교부장관(88~90), 국무총리(91~92).
△노신영: 외무부장관(80~82), 안기부장(82~85), 국무총리(85~87), 민정당 고문(87).
△황인성: 국방부 재정국장(63~68), 민정당 국회의원(81~88), 국무총리(93).
△안응모: 치안본부장(82~83), 안기부 1ㆍ2차장(88~90), 내무부장관(90~91), 자유총연맹 총재(96~98).
여기서 무엇보다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숭모회의 초대와 3대 이사장을 잇따라 역임한 윤치영의 삶이 안중근 의사의 그것과 너무나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 의사 가문이 ‘독립투사 가문’의 전형이라면,
윤치영 가문은 ‘친일파 가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윤치영의 큰형 윤치오와 둘째형 윤치소가 10년을 시차로 하여 차례로 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으며,
셋째형 윤치성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군 기병중장을 역임했다.
특히 둘째형 윤치소는 1937년 8월 당시 쌀 1백20가마에 해당하는 2천원을 국방 헌금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윤치영 스스로도 이동치영(伊東致暎)으로 창씨개명한 것은 물론이고
임전대책협의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했음은 물론이다.
친형제들만 친일행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윤치영의 백부 윤웅렬은 구한말에 일본식 별기군 창설을 주도해 좌부령관을 맡고 있다가 임오군란 당시 군졸과 민중들의 습격을 피해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후 갑신정변으로 귀국한 뒤 우여곡절 끝에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의 직위와 매국공채 2만5천원을 받았다.
윤웅렬의 장남이자 윤치영의 사촌형인 윤치호도 한때 독립운동에 나선 적이 있으나 전향 이후 노골적인 매국의 길을 걸은 대가로
1945년 조선 내 7인의 일본 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바로 그 천하의 친일파였던 윤치호의 손녀가 현 조선일보 사장인 방상훈의 부인이라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달고 발행했음에도 전시체제의 물자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폐간하고 월간지 <조광>을 확대 개편한 뒤
“한일합방은 동양의 평화와 조선의 행복을 위해 체결한 조약”이라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에 반역했던 조선일보 등
우리 사회의 수구ㆍ기득권 세력들이 친일파 청산 문제만 나오면 알레르기적 반응부터 보이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 대목이다.
따라서 안중근 가문과 윤치영 가문은 “항일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치욕적인 금언을 현실에서 보여준 전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던 윤치영이 안중근을 숭모하는 단체의 대표였다는 것이 얼마나 역사에 대한 모독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던 윤치영이 안중근을 숭모하는 단체의 대표였다는 것이 얼마나 역사에 대한 모독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랬던 윤치영이 안중근을 숭모하는 단체의 대표였다는 것이 얼마나 역사에 대한 모독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 현 숭모회 관계자들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
예컨대 윤치영의 친일 부분과 관련해 김영광 숭모회 부이사장은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 임영신 등과 함께 하와이에서 독립운동한 전력이 있는 윤치영을 친일파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반박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치의 타협도 없이 자신의 생명을 초개같이 내던졌던 안중근 의사가,
자신의 유업을 이어받기 위해 만들었다는 단체의 간부가 했다는 이런 변명을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실제로 안의사는 순국하기 이틀 전인 1910년 3월 24일 면회 온 두 아우 정근과 공근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윤치영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군의 침략전쟁을 위해 춤추며 만세를 불렀다.
실제로 그는 1942년 <동양지광> 3월호에 ‘싱가포르 함락을 경축함’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글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세기적 경사를 당해서 더한층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업적과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서 일억일심……
총후 국민의 의무를 엄수하고 팔굉일우의 정신을 전 세계에 선양함에 의해서,
대일본 제국의 위대한 사명을 세기적 경축과 함께 발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도 그는 해방된 나라에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군을 바꿔가며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렸다.
오죽하면 민족문제연구소가 <청산하지 못한 역사-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인> 제1권에서 윤치영을
“외세와 독재권력에 아부하여 ‘잘 먹고 잘 산’ 자의 표본”이라고 규정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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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찰 노릇이죠...
말 그대로 유머입니다..
대한민국의 가장 위대한 독립투사 중 한명이었던 안중근을 추모하는 단체의 이사장이 친일파인겁니다...
윤치영은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반론으로 <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삼성출판사.1991>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정치는 혁명이나 독립 운동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일제하에서 왜놈에게 협력했다고 해서 신생국가가 이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처벌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에서 우리가 본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도 회개하는 사람은 일단 그 죄를 사해 주듯이
해방된 조국이 새 정부를 출범시킨 마당에
우리가 또 다른 우리 적인 공산당을 북에 두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국민은 서로 관용과 용서로써 이해하고 화합하고 대동단결하여
우리의 영도자인 이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신생국가 건설에 일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에라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