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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역사 저장소] 싱가폴 上편 링크: http://www.ilbe.com/4757489118
이전글 추천 많이 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中편을 1,2 편으로 잘랐다.
1편은 2차대전, 2편은 전쟁후-독립이전으로 쓸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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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1)편 2차대전 (1941-1945)
1930년대 동아시아에는 일본의 호전적인 정책으로 전운이 감돌아.

1937년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지만 거센 저항을 맞닥뜨려 고전을 면치 못하지.
거기에 중국침략에 대한 시위로 미국 영국 네덜란드가 일본에 대해 금수조치를 취하면서

철광석, 강철, 석유같은 전쟁에 필수적인 물자들의 공급이 끊기자
일본은 동남아시아로 전쟁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껴.
그 이유로 첫번째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함으로서

인도네시아에서 나는 석유

말라야에 풍부한 고무와 주석 등
전쟁물자들을 확보할수 있었으며
두번째로

인도차이나를 점령해서 중국이 외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오는 거의 유일한 육로를 차단할수 있었기 때문이야.
이로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크게 두가지 전쟁 계획을 세우는데

하나는 태평양을 배경으로 한 미국과의 동부전선에 관한것이였고
또 다른 하나는

동남아시아를 점령하기 위한 남부전선에 관한 것으로
속전속결로 이 지역을 점령한 다음 방어태세로 전환해 종전협상을 타결하는 것 이였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홍콩 필리핀 말라야 등을 기습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1941년 12월 25일 홍콩 점령
1942년 1월 초 필리핀 점령
1942년 1월 말 말라야 점령
1942년 2월 중순 싱가폴 점령
1942년 3월 초 인도네시아 점령
1942년 4월 말 버마 점령
으로 불과 반년도채 안되어 남부전선을 정리해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의 작전은 가히 성공적이였어.
싱가폴에 초점을 맞춰서..

전쟁 개시 후 일본군의 폭격을 두드려 맞은 태국은
2주 만인 1941년 12월 21일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이로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은 인도차이나 한복판에 위치한 태국을 교두보로 삼아 훨씬 수월해 졌어.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가 말라야의 정글이 천연적인 방어물이 될것이라 믿어 자신만만 했던 영국군은

우세한 항공전력에 힘입어

경전차와 자전거를 이용해 쭉쭉 밀고 내려오는 일본군에게

불과 53일만에 말라야를 내어주게 돼.

이제 싱가폴은 일본군과 접경을 하게 되었어.
1942년 1월 31일 연합군은 말라야와 싱가폴을 잇는 다리를 폭파시켜 버려.
싱가폴 전투가 막을 올린거야.

(싱가폴 식민지 휘장)
우선 싱가폴은 영국이 "난공불락의 요새" 로 자부하고 있던 곳이야.
수적 전력도 영국 인도 말라야 호주 군으로 구성된 8만 5천명으로 3만 6천의 일본군보다 훨씬 우세에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군은 비효율적인 군 운영과 일본군의 노련함으로 대패해.
그 예화로

일본군 사령관이였던 도모유키 야마시타는

(현재의 조호 술탄궁)
이미 점령당한 말라야 조호의 술탄궁에 사령부를 설치하는데
이곳의 꼭대기에서 바다 너머로 싱가폴에 있는 연합군의 배치를 한눈에 볼수 있었기 때문이야.
쉽사리 포격의 대상이 될수 있었기에 내부적으로 우려가 있었지만
야마시타는 그 궁이 조호 술탄의 자부심의 상징이기 때문에 연합군이 공격하지 않을것이라고 내어다 봤고
이 예상은 적중했어.

마치 스타를 할때 내 기지에 옵저버가 있는줄 알면서도 잡지 않은 꼴이지.

일본군은 싱가폴에 약 1주일간 공습과 포격을 퍼부어 연합군의 전체적인 전력을 약화시키고

싱가폴의 북동쪽 맞은편에서 의도적으로 군사 움직임을 늘려서 그쪽에 방어 병력이 몰리게끔 만든다음
1942년 2월 8일 밤 북서쪽에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해해.
스포트라이트 같은 장비들은 이미 북동쪽으로 옮겨놓은 터라
북서쪽을 지키던 연합군 기관총 대대는 어둠속을 향해 사격 할 수 밖에 없었고
원래 바다를 건널때 기관총 포화를 뚫으면서 극심한 피해를 입어야했던 일본군은
별 피해 없이 싱가폴에 상륙할수 있었어.

그 후 일본군은 어둠속의 정글사이로 숨어들어가 연합군 기지의 주요시설 곳곳을 파괴해
후속부대가 상륙하기 용이하게 만들어 놓고
다음날 새벽 1시 더 많은 증원군들이 도착해
날이 밝을때쯤 북서지역을 지키던 연합군들은 거의 반 이상의 병력을 잃고 포위되기에 이르렀어.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연합군 사령관 퍼시벌은 (어리버리하게 생김 ㅍㅌㅊ?)
일본군이 북동쪽에 상륙할것이라고 믿고 북서쪽에 지원 병력을 보내는걸 거부해.
그러는 사이 같은날인 2월 9일 일본군은 섬의 남서쪽에 상륙하고 연합군은 동쪽으로 밀려났어.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폭격으로 인한 통신망 두절로 각 부대사이의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도 있어.
그러는 와중 2월 10일 퍼시벌은

당시 영국 수상이였던 윈스턴 처칠에게 이런 전문을 받았어.
"나는 지금 본국이 자네가 싱가폴에서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게 좋다고 생각하네.
자네는 말라야 반도에 있는 일본군을 다 합쳐도 안될만한 10만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다고 보고 받았네.
자네는 자네의 목숨을 내놓고 부대의 모든 인력을 희생시켜서라도 싱가폴을 지켜내야 할걸세.항복은 있을수 없네."
싱가폴을 어떻게든 사수하려는 영국의 의지를 옅볼수 있어
그러나 ..

(항복협상 중인 퍼시벌과 야마시타)
처칠의 소망과는 반대로 연합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2월 15일 항복해 버려.
그런데 이때 연합군이 밀리고 있었던건 맞지만 사실 아직 항복할 상황은 아니였어.
일단 기본적으로 연합군은 일본군에 비해 3:1 비율 이상으로 수적 우세에 있었고
일본군은 갓 점령한 말라야 반도를 통해 보급품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어떻게든 버티면 상황이 역전될 여지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야.

여기서 야마시타의 사령관으로서 기량이 돋보이는데 그는 차후에 이렇게 말했어.
"내가 싱가폴을 공격한 것은 속임수였다. 내 수중에는 3만의 병사밖에 없었고 전투가 장기전으로 이어지면 질수밖에 없는 싸움이였다.
나는 혹시라도 연합군이 나의 취약한 보급선과 수적 열세에 대해 알게되어 장기전을 대비할까 걱정이였다.
그렇기에 나는 단번에 공세를 펼쳐 항복을 받아내어야 했다."
실제로 그는 2월 11일 부터 퍼시벌에게 지속으로 무의미한 싸움을 그만두라고 항복을 권유했고
2월 14일 연합군의 알렉산드라 군병원을 점령한 후 안에 있던 모든 환자와 의사들을 무차별로 살해한후
약 200명의 부상병들을 행군시켜 낙오되는 자들은 총검으로 죽여버리는 등
무자비한 행동으로 연합군이 항복하게끔 유도해.

(항복하는 영국군)
그렇게 8만의 연합군은 겨우 3만 가량의 일본군의 포로가 돼.

(싱가폴 시내에서 행군하는 일본군)
그렇게 싱가폴은 1945년 까지 일본에게 점령당하고 쇼난토 (남쪽의 빛) 이라고 명명 돼.
35년 조선의 일제 감정기만 하겠냐만 싱가폴도 이 시기 많은 고초를 겪는데
중국인들은 대부분 반일분자라고 믿었던 일본의 대대적인 중국인 숙청 작업이 행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강제적으로 보르네오섬, 버마 등으로 보내져서 노동력을 착취당해.

또 중국인에 대한 처우와는 달리 인도인들에게는 잘 해줬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일본군이 인도를 침략할때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어.
실제로 일본은1942년 싱가폴에서만 약 3만의 인도인을 징집해서 인도해방군을 설립해.
나중에 인도에 갈때 데리고 갈 심산이였지.
이건 나중에 독립 후 싱가폴을 괴롭히게 될 인종갈등의 씨앗이 돼.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싱가폴은 다시 영국의 치하에 들어가지만

전쟁을 겪은 싱가폴은 많은것이 바뀌어 있었어.
영국으로 시작해서 부흥한 싱가폴이였지만 영국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떨어지고 실제로 영국의 힘도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야.
전쟁 후 독립 이전까지 싱가폴에는 정치적인 격변들이 일어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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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줄 요약
1. 영국이: 아! 싱가폴은! 난공불락의 요새다! 했는데
2. 잘 못싸워서
3. 15일만에 함락당함
中(2) 편에서 계속해서 쓰도록 할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