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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3.07.09 06:01

[threadic] 등가교환

조회 수 1333 추천 수 0 댓글 0





1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4 22:59:56 ID:2GheYNnQXWA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일단 나는 어엿한 학생! 성격은 전혀 만만치 않고 성깔도 있다. 참 잘 개기는 성격인데다 내가 오늘하루 했던 말을 전부 글로 써 보면 뭐 이런 싸가지없는 년이 다 있나 하고 얼굴 일그러뜨릴 정도야.
그러다보니 일진한테도 개기지.... 부당한 건 전혀 못참는 성격이라.

2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4 23:05:55 ID:2GheYNnQXWA
학교마다 일진이 없을 리는 없지. 사막에서 바늘찾기잖아?
1학년때부터 난 여장부와 같은 여일진과 싸우고 투닥거렸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응, 아주 순식간에.... 그러다보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왠만한 애들은 날 안 건드렸어.

학년이 올라와서, 문제가 생겼다.
순탄한 학교생활에 대해 개념이 덜 찼던 나는 첫날부터 자기 옷 갈아입는다고 교실에 있던 세명의 여자아이들에게 나가라고 했던 남자애한테 너 때문에 왜 우리가 피해를 보느냐. 네가 나가라, 하며 개겼고,
....바로 찍혔다. 제기랄.

그뒤부터 놈은 툭하면 내 의자를 차대거나 굳이 나를 들먹이며 수업시간에 창피를 줬다. 내가 발표하는 때가 있으면 '시x 귀썩겠닼ㅋㅋㅋㅋ 야 귀막아라' 하고 지 친구들한테 떠벌리는 가 하면,
대놓고 내 친구한테 '얘랑 왜 놀아' 하고 물은 적도 있었다. 물론 친구는 'ㅡㅡ?' 하는 얼굴로 봤지만 말이야.

3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4 23:09:52 ID:2GheYNnQXWA
물론 내 더러운 성깔로 겨우 그거에 상처받을 일은 없었다. 훗. 차라리 어른을 울리는 게 더 쉬울듯.
그런데 어느 날, 정말 말싸움이 크게 붙었다. 계기는 사소했어. 교실에서 우리는 시험대형으로 앉아서 자리가 좁았거든. 그것 가지고 그랬어.
초반 그놈은 씨x년이라느니 미친x, 병신이라는 말만 사용해대다가 끝에 가서는 네 어미가 창년이라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 순간 뭐라고 대응해야할지 먹먹했어.
이제까지는 나도 삿대질해가며 욕썼지만 엄마 욕? 정신이 아득해지는것과 동시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외동이라 특히 엄하게 자랐어.
예의는 상대간에 꼭 지켜야 할 거라고... 엄마도 내가 상대적으로 잘 다툰다는 걸 아니까 싸우더라도 가족이나 친지 욕은 하지 말라 가르쳤고,
그것도 상대방에게 심한 욕을 했다간 진짜 혼났다. 얼마나 심했냐면.. 화장실에 갇혀본 적도 있어.

4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4 23:11:26 ID:2GheYNnQXWA
어쨌든,
'맞다. 니년 엄마 없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고 놈은 내가 대꾸가 없자 희희낙락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더라. 억울함과 동시에 졌다는 상실감? 저 놈은 밑바닥이 얼마부터 썩어들어갔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에 꿈을 꿨다.

5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08:23 ID:t+ypRzoVoQs
꿈에서 난 천막에 있었던 것 같아. 점집같지만 아늑했어. 천장에는 전구가 하나 걸려 있었고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안이 넓더라... 그리고 중앙에 마호가니 같은 탁자와 여자가 하나 앉아 있었는데 선녀더라.
쌍꺼풀 없는 큰 눈이 참 선하게 생겼고 맑았어. 뭐라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데, 정말 김태희와 박보영을 종으로 부리고도 남을 외모였어. 보는 이조차 밝아질 수려한 얼굴.
그런데 난 뜬금없이,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에게 아무 앞뒤 없이,
"소원 들어줘" 하고 말했다.

6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13:47 ID:t+ypRzoVoQs
여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상자를 줬어. 엄청나게 컸는데 열어보니 노란 쪽지가 한 장 들어 있더라고. 여자는 웃으면서 그 안에 소원을 쓰라고 했어. 
나는 그때 너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내게 욕을 지껄인 놈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생각을 고쳐먹었지.
근거 없이 정말로 이게 이루어질거라고 생각했거든. 몰라, 그냥 그렇다는 걸 무의식적에 생각한 것 같아. ...근거없이.
하여튼 그래서 ㅇㅇㅇ이 좀 다치게 해줘 라고 적었어. 그런데 수신인과 발신인이라고 잉크 글씨로 있더라.
수신인에는 당연히 놈의 이름을 적었고 발신인에 내 이름을 적으려는데,
"꼭 네 이름 적을 필요는 없어" 하고 여자가 웃었어.
그래서 난 그냥 내 친구 이름을 적었지. 악의는 없었어, 정말 가장 친한 친구라, 그리고 친구도 놈을 죽도록 싫어하는 터라 그냥 생각났어.
쪽지를 상자에 넣고 여자에게 건네줬어. 여자는 슥 보더니 '얼만큼 다쳤으면 좋겠어?' 하고 물었어. 부끄럽더라.
그래도 우물쭈물하다가 '계단에서 구르거나 넘어지는 정도' 하고 답했어. 여자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리고 잠에서 깼어.

7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18:10 ID:t+ypRzoVoQs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집에 가 보니 정말 녀석이 다쳐서 오더라.
집이 3층이라 그냥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뒤에서 누가 미는 것 같았다고. cctv 확인해볼거라고 놈이 욕을 짓껄이며 교실 안으로 시끄럽게 들어왔다.
헐. 진짜 이루어졌다, 하고 생각하곤 '우연이네' 라고 단정지었어.
그래도 사람 마음이... 음.. 정말 그 여자가 소원을 들어줬나 하는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다친 건 놈뿐 만이 아니더라.
내가 이름을 적은 친구도 같이 다친 거야. 친구는 학교 계단에서 굴렀는데 많이 다치지는 않았고, 몸을 감싸서 긁힌 게 다더라고. 일단 화가 나기 전에 미안했어. 그냥 내 이름 적을걸, 병신같이..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뭐야? 하고 불만스러웠지만 동시에 공포스러웠어. 그리고 '다시는 꿈에 안 나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날도 나는 꿈에서 그 여자를 만났지.

8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23:35 ID:t+ypRzoVoQs
여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어. 무섭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 친구한테 왜 피해를 줬어요?"
하고 물었어. 그게 그 여자가 확실하다는 듯, 친구의 잘못은 전혀 없다는 말투로. 말을 하고 나서 내가 뭔 지랄인가 싶었지만 여자는 표정이 미묘해졌을 뿐 아무 반응도 없었어.
"그러면 무사하리라고 생각한 거야?"
어린아이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소름이 쫙 끼치더라. 그랬어.
정말 엄마가 누누이 말하듯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정말 내가 무사하리라고 생각했나? 친구는 내가 다칠 걸 고스란히 가져간 거잖아.
그래도 일단은, 따져 물었다.
"왜 나한테 그걸 적지 말라고 했어요?"
"적은 건 너야. 꼭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책임 전가는 그만해. 재밌었지?"
'만족했나'가 아닌 '재밌었나'
그 순간 선한 인상에 대한 호감이 싹 사라졌다. 이 미친년은 뭐야 하는 눈빛을 눈치챘을 법 한데도 여자는 웃더라. 그 웃음이 이제는 이물질이 눈에 들어온 것처럼 이질감이 일었어.
녀석이 다쳤을 때만 해도 '어? 진짠가?' 하는 호기심이 순식간에 역겨움으로, 그리고 두려움으로 오염되더라. 여자는 소리없이 웃고 나더니 말했어.
"더 빌 소원 없어?"

9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29:30 ID:t+ypRzoVoQs
"없어요"
있더라도 대답 안 해!
제기랄. 난 속으로 가운데손가락을 들어주며 냉정하게 답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머리를 미친듯이 내저었지. 락커의 헤드뱅잉마냥... 강한 부정..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하더라. 솔직히 없...다고는 못하지. 놈이 좀 말을 곱게 썼으면 좋겠고 반성도 했으면 좋겠고, 집안 형편이 안좋으니 돈이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고. 다친 친구도 나았으면 좋겠고.
그래도 입을 다물었다. 녀석이 계단에서 굴렀다고 친구도 계단에서 구르던데, 거의 1대 1로 교환되는 거잖아.
유료 서비스(?)라는 것보다는 피해를 준 만큼 고스란히 피해를 입더라고.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 게, 내가 남한테 이득을 주면 어떻게 되나? 하는 거였어.
그래서 나는 다시 소원이 있다고 말한 뒤에 여자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예의 그 커다란 상자를 받았어.
여전히 안은 썰렁했고, 이번에는 흰 쪽지가 들어 있었어.
'계단에서 구른 내 친구가 나았으면 좋겠다' 라고, 발신인에는 친구 이름을 쓰고 수신인에는 내 이름을 썼어. 그리고 또 깼지.
소보루 빵을 한손에 들고 한손엔 가방을 메며 가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나있더라. FUCK!!!!! 점검이 아직도 안끝났어! 하고 욕을 내지르며 계단으로 뛰어갔다.
여자는 이미 아웃 오브 안중. 지각은 아니더라도 혹시 모르니까 막 뛰어가는데, 마지막 1층에서 발이... 삐끗.
발목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아주 그냥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여자의 쳐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 시x년.... 대가가 이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미안. 난 원래 입이 험해서...

10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5 18:35:35 ID:t+ypRzoVoQs
겨우겨우 전화를 해서 병원에 갔다왔어. 인대가 늘어났다더라. 그때는 정말... 여자 싸대기를 날리고 싶었어. 젠장!
뭔가 의미없는 근거가 있기는... 했어. 친구가 계단에서 굴러 다친 걸 나았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댓가로 친구가 다친 만큼, 그러니까 네가 계단에서 굴러라, 이 뜻인 것 같더라. 실제로도 맞았고.
아빠 차를 타고 학교에 절뚝거리며 등교했어... 그리고 친구는 남친이 위로해주던데 나는 뭐지? 하고 솔로의 슬픔을 고이고이 혀끝으로 씹으며 엎드려 잤다. 그런데 자면서도! 또! 여자가 나오더라!
얼쑤, 지화자 좋다 하고 울분이 나서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다쳐요" 하고 따졌다. 그러자 여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등가교환" 이라고 말했다. ...그래.. 등가교환. 참 그 반질거리는 싸대기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사람 때리는 건 별로 용기가 없어서 그만뒀다.
이상한 경험은 이 정도로 됐다 싶어서,
"다음 번엔 당신이 안 나타났으면 좋겠..." 하는 순간 종이 쳐서 깼다.
말을 끝까지 못 끝내고 쪽지에 못 적은 게 걱정스럽긴 했지만 다음 시간 숙제를 안했으므로 강제스루.

17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6 15:13:34 ID:dS2FrFvyP4s
꿈에서 말한 대로, 당분간 그 여자는 안 나왔어. 발목이 아플 동안은.
인대 다 낫고 나서 얼마 안 됐는데 눈앞에 또 그 등불이랑 마호가니 탁자가 보였어.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는 차를 권했는데 마시지는 않았어. 왜 또 나타났느냐고 물었지. 여자는 내가 부른 게 아니야 하고 묵묵한 얼굴로 대꾸했다. 웃지는 않더라.
내가 부른 거냐고 물은 말에 여자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자기도 모른다고. 그런데 정작 난 빌고 싶은 소원이 없었다. 그래서 천막을 그냥 돌아다녔지.
한쪽 구석에는 상자들이 쌓여 있었고, 천장에 전구 하나가 달려있었어.
그리고 은근히 별 것 없더라. 별다른 걸 찾아보려고 해도 없었어.
전과 달리 분위기가 무언가 무거웠다. 여자는 웃지 않았어. 가라앉아보이는 무표정. 나는 보내달라고 했지. 그 순간 여자가 약간 화난 얼굴로 쏘아붙이더라.
"네가 왔으니 네가 가."

18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6 15:18:56 ID:dS2FrFvyP4s
그런데 정말로 가기는 쉽지 않더라.
나한테 말하지 말고 네가 가라, 보다는 가지 말라는 뜻이 더 강해보였어. 소원으로 다시는 이 꿈 안 꿨으면 좋겠다고 빌려다간 진짜 얻어맞을 것 같더라. 그만큼 기세가 흉흉했어.
그냥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와. 세상에, 암흑이더라. 아무것도 없어. 진짜 새까만 검은색. 그만큼 검은 건 처음 봤어. 한 발짝 내딛으려는데 길이 없어보였어. 식은땀이 흐르면서 그냥 멍하니 내다보기만 했다.
온통 검었는데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원근감도 느껴지지않을 만큼 새까맣다... 검은 페인트를 동공에 칠했다고 느낄 만큼.
아마 저절로 문이 닫혔고, 정신을 차렸어. 여자는 다시 물었지.
"차 마실래?"
뭐.. 그냥 단순했다. 녹차보다는 단데 쓰기도 하고, 달기도 했고. 양도 얼마 없더라.. 여자는 내가 차를 다 마시니까 다시,
"소원이 뭐야?"
하고 물어왔다.

19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6 15:23:44 ID:dS2FrFvyP4s
나는 입을 다물었어.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나? 막연하더라. 여자는 권유보다는 이제 강요에 가까운 투였어. 소원을 빌어.
뭔가 몸이 움츠려지는 말에, 할 수 없이 나는 사소한 것을 빌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원망과 질타를 제일 두려워하거든. 평가도 신경쓰고..
그래서 노래를 잘 하게 해주세요, 라고 빌었다.
그리고 나는 한두 달간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목감기를 심하게 앓았어. 그런데 어느 한순간부터 갑자기 고음이 잘 올라가더라. 아이유 노래도 무리없었고...

22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8 21:25:54 ID:Iq4AI2c6Dfk
그 다음부터 여자는 매일 내 꿈에 나왔어. 시험기간이라 네,다섯시간밖에 자지 못할 때만 제외하고. 내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피곤해서 꿈을 꿀 틈도 없는 걸까.
나는 피곤하면 꿈을 꾸지도 못할 만큼 잠에 심취한다고 믿는 편이라 말이지!
아무튼, 그것도 아니면 정말 드문드문 방안의 조명과 마호가니, 혹은 여자만 생각날 때도 있어. 이건 내 딸리는 기억력으로 밤새 꾸었던 꿈을 잊어버리는 경우...

친한 친구라고 믿었던 아이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어. 우리가 친구가 아니였다는 거야. 그래, 납득했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싫어질 수 있지.
그런데 몇달간이지만 정말 친했는데 뺨까지 때려가면서 그렇게 말 했어야 하나. 자존심도 상하고 친구 잃은 것만으로도 화나는데 사람이 그렇게 못될 수가 있냐. 왕따는 아니었어, 물론.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정말 하루종일 울었어. 꿈에서도 울었을 걸... 지금보면 그년때문에 내가 왜 그랬나 싶긴 하지만..ㅇㅇ

23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8 21:29:58 ID:Iq4AI2c6Dfk
그냥 소리없이 우는데 여자가 상냥하게 말하더라.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처음 들었던 때처럼 달콤했어. 무섭지도 않고 포근한 느낌, 엄마와 같은 다정한 느낌. 어릴 적 엄마가 손에 쥐어주였던 손난로처럼 천막 안이 따뜻하더라.
나는 바보같이 엉엉 울면서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했어. 여자는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지만 그냥 내가 그렇게라도 해야 편할 것 같았으니까.
여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하고 물었어.
내가 미친년이지, 그때의 나는 그런 것에 좋다고 그애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나같은 기분을 꼭 맛봤으면 좋겠다고 훌쩍였어. 그때는 그런 식으로 대답했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나만큼만 비참해봐라. 대충 이런 뉘앙스.
원체 힘이 세던 년이라 뺨이 부어오르고 휘청 주저앉을 정도로 세게 맞았거든. 그걸 내 친구들 앞에서, 그애 친구들 앞에서 맞은거야.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24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8 21:37:52 ID:Iq4AI2c6Dfk
여자는 앉지도 않고 울던 나를 보더니 가만히 달래줬다. 별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는데 그저 내가 만족했어. 차를 한 잔 주고, 그때는 겨울이었으니 목도리를 매어줬어.
나도 생각은 있으니 이제 됐다고 말하고는 그냥 가만히 앉았다. 뻘쭘하지... 민망하고.
초라한 침묵 아래에서 손톱만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거든. 여자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상자를 건네줬다. 순간 찬물벼락을 맞은 듯이 정신이 또렷해졌다. 안에는 예의 그 쪽지가 들어 있었고 양식도 똑같았어. 흘림체로, 그러나 또박또박하게 눌러쓴 듯한 수신인과 발신인이 적혀있는 잉크글씨.
그러나 거부할 수가 없었다. '죄'로 느껴졌거든. 맞서기엔 두려운 존재였다. 흠씬 혼이 난 아이가 엄마를 느끼는 감정과 조금 흡사했다.

25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8 21:42:32 ID:Iq4AI2c6Dfk
그러나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은 내 잘못이지. 눈치챈 레스더들도 있겠지만 나는 감정이 굉장히 격한 편이다. 그때는 차라리 그애가 없어지길 바랬어.
그래서 나는 수신인과 발신인 전부 그애를 적었다. 나만큼 아파봤으면 좋겠다. 여자는 내 머리를 툭툭 기분나쁘지 않게 두드리고는 웃어주었다. 그 모습이 선해보이더라.

그리고 사흘쯤 뒤에, 여자는 줄곧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은근히 죄책감에 시달려했다. 얼마간 다치지도 않고 잘 다녔으니 밉긴 하지만 괜찮다고...
다음 날, 그 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교통사고로 발목이 갈리다시피 했다고 전해들었다. 내 친구가 자기가 봤다고,
'사람의 피부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똑똑히 봤다' 라고 할 만큼 섬뜩하게 다쳤다고 했다. 무단횡단으로. 그리고 방학때까지도 나오지 않았어.

26 이름 : 이름없음 : 2013/07/08 22:12:52 ID:Iq4AI2c6Dfk
반전있더라... 여자에게 가서 따지고 싶었어. 그런데 순간 내 자신이 혐오스러웠어.
나는 정말 안타깝기만 했나? 그애가 다친 게 불쌍했어? 내 뺨을 때린 그애가 교통사고로 다치게 한 건 나잖아?
내가 이렇게 더러운 년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따지고보면 내 말을 들어준 잘못밖에 없었고, 나는 거센 감정에 홀려 일을 그르쳤다. 한때나마 제일 친한 친구를 그만큼 다치게 했어.
죄책감때문에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것 같네.







http://bbs.threadic.com/goedam_new/1372946408/l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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