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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3.07.09 05:43

[threadic] 반전反轉

조회 수 1324 추천 수 2 댓글 1






오랜만입니다. 한동안 연락을 드릴만한 상황이 아니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아, 지금 하려는 얘기가 바로 그 얘기에요.
혹시 이 지구상에 우리가 모르는 곳이 있다고 믿고 계십니까?
아니, 한 번이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난데없이 무슨 소리인가 싶으시겠죠.
사실 저도 그때 제가 본 것이 헛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곤 합니다.
기억하시는진 모르겠지만 저번에 뵈었을 때 제가 과외를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아, 기억하시는군요. 그렇다면 그 학생에 대해서도 기억나십니까?
동글동글한 얼굴이 인상적인 여고생이요.
맞아요, 이 아이가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이제부터 그녀를 J라고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J는 한순간 바보가 되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바보가 되었어요.
J는 글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짤막한 문장은 한 글자씩 더듬더듬 읽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 이상의 길거나 빽빽한 문장은 계속 잘못 읽거나 읽는데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거기에 더해 글을 쓸 수가 없게 되었고요.
오른손 잡이였던 녀석이 갑자기 왼손으로 삐뚤삐뚤 글을 쓰려 들더군요.
마치 자기가 여태 어떤 손을 써왔는지 인식이 안 되는 사람처럼요.
방향 감각도 잃었고, 심지어 학교로 가는 길도 몰랐습니다.
그거야 며칠만에 해결이 되었긴 합니다만, 그래도 황당한 일임은 분명하죠.
네? 말은 할 줄 알았냐고요? 네. 그거야 그렇습니다. 기억도 온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과 나는 모두, J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나를 알았고, 나와 있었던 일을 기억했지만 가끔 말도 안되는 엉뚱한 소릴 하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것 말이지요.
이달의 마지막 토요일에 제가 J에게 밥을 사주기로 했었습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거든요.
안타깝게도 J는 성적이 올라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이건 제 책임이 아닙니다.
J가 수학 시험의 범위를 잘못 아는 바람에 엉뚱한 곳을 공부해서 벌어진 일이라고요.
저는 J를 골려줄 생각으로 농담을 했습니다.
성적이 참 눈부시게 올랐으니 레스토랑까지 업고 가야겠다고요.
그러자 잠깐 생각하는 듯 하던 J가 갑자기 굉장히 뻐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J를 잘 압니다.
스스로의 실수를 그런 식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아이가 아닐 뿐더러 그녀는 농담을 하고있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시험을 치자마자 제게 전화를 걸어 울면서 한 시간 동안 자책했던걸 생각하자면, 더 이상합니다.

그런 식으로 J의 이상 행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나아졌다지만 잃어버린 방향감각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녀의 방은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야 거실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왼쪽으로 가려하더군요.
학교야 그렇다 치지만, 자기 집의 구조조차 제대로 모르는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상했던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 이 일은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겼었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보니 이게 그녀의 이상행동을 말해주는 가장 결정적인 단서더군요.
무더운 여름날이라 J의 옷차림은 점점 짧아졌습니다.
어느날은 민소매를 입고 왔는데, 왼쪽 팔에 흉터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렸을적 끓는 주전자에 데여서 생겨버렸다는 그 상처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J의 큰 콤플렉스 중 하나였습니다. 여태껏 감춰왔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이상했던데다, 흉터가 오른쪽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 그래서 J에게 물어봤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원래 왼쪽에 있었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연히 J의 흉터를 딱 한 번, 지나가듯 본게 다였으니까요.
하하, 너무 그렇게 재촉하지 마세요.
지금 있었던 일을 어떻게든 생생히 떠올리려 애쓰는 중이니까요.
맞아, 그러고보니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정말 우연히, 미리 말하는데 정말 우연이에요.
정말 우연히 J의 일기장을 훔쳐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주실래요?
누구누구와는 달리 여고생의 사생활을 캐는 취미따윈 없다고요.
정말 우연이었습니다.
수업을 하기 위해 집에 도착했더니 그녀는 잠깐 자리를 비웠고, 쓰고 있었던건지 일기장이 책상 위에 펴져 있더군요. 어쩐지 호기심이 생겨서 겉눈질로 힐끗 보았습니다.
왜 내용을 묻는 겁니까? 난 변태가 아니라니까요.

아니, 애초에 읽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꽤 충격을 받아서 내용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기장에 여고생다운 글씨로 빼곡히 쓰여진 문자들은, 마치 좌우를 반전시킨 것처럼 뒤집혀 있었습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그게 은근히 무섭더군요. 아예 모르는 문자면 또 모를까, 아는 문자가 괴상하게 변형된 걸 보니 어쩐지 징그럽기도 하고…… 소름도 좀 돋고…….
약간 혐오감과 함께 드는 생각은, 이걸 어떻게 적었을까? 하는 거였습니다.
아, 정말이네요? 그러고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오른손 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쓰면 그런식으로 적히는군요.
그땐 당신처럼 그런 생각은 못 하고 이상하고 무섭기만 했습니다.
거기다 소녀의 일기장인지라 차마 본인에게 물어보지도 못했지요.
차라리 혼자 궁금해 죽는게 낫지, 여고생 일기를 훔쳐보는 변태 선생따윈 되고싶지 않았어요.

J는 곧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글씨는 꼭 유치원생들이 갓 쓰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맞습니다. 괴발새발이요. 아, 괴발개발이라구요? 괴발새발이 아니라요? 거참 별 이상한 말도 다 있군요.
아무튼, 글을 쓸 때의 그녀는 아주 어색하고 불편해 보였습니다.
글씨체 역시, 여태까지의 동글동글하고 예쁜 것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때 다이어리에서 봤던 뒤집힌 글씨가 훨씬 반듯하다는거 아니겠습니까?
왜 글도 제대로 못 쓰고 잘 읽지도 못하냐는 제 질문을 J는 이리저리 빠져나갔습니다.
처음 몇 번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녀가 말을 돌렸다는 사실조차 몰랐어요.

그때부터 제 마음 속에선 의문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J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J가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며 그를 제게 소개시켜주었습니다.
어떤 소년의 팔짱을 낀 그녀는 굉장히 행복해 보였어요.
하지만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저번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 소년을 좋아하지 않았단 겁니다.
오히려 싫어했다는 쪽이 더 타당할 듯 싶습니다.
끈질기게 문자를 보낸다고, 귀찮고 싫다고 진저리를 쳤었습니다.
뭐 그렇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드디어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히 그녀가 보여줬던 J의 이상한 행동이 떠올라 축하는 커녕 찝찝하기만 하더군요.

하지만 J의 변화는, 말하자면 아주 긍정적인 쪽이었습니다.
사춘기를 겪는지 서먹서먹하던 부모님과의 사이도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J는 약간 무뚝뚝한 성격이 무색하도록 주위 사람들, 특히나 부모님께 잘 했습니다.
평소 본체만체하던 남동생과도 아주 잘 놀아주더군요.
저의 찝찝함만 제외하자면 모든것이 더할 나위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은, 결국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어느날 학교에서 레포트를 제출하려는데 USB가 안 보이는게 아니겠습니까.
깜짝 놀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마지막으로 USB를 꺼낸 곳이 바로 J의 집이더군요.
J의 남동생은 초등학생이어서 이른 오후에도 집에 있곤 했습니다.
그 아일 믿고 J의 집에 찾아갔는데, 역시나 그녀의 남동생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나는 당연히 J가 없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그녀의 방문이 활짝 열려있더군요.
어쩐지 누가 있는 것 같아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곳에는 J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한 손에 손거울을 들고 그것을 빤히 들여다보더군요.
사춘기 소녀가 외모를 가꾸는거야 별 놀라운 일이 아니긴 합니다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한참 후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 행복해. 태어난 이래로 제일 행복해."

왜인지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만 같아 나는 조심스럽게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레포트는 어떻게 됐냐고요? 묻지 마십시오.
우연히 목격한 그 장면 외엔 J의 이상한 행동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착각한다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도 점차 줄어들었고요.
글씨도 점점 나아져서 이젠 읽을만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나 역시 J에 대한 찜찜함을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J의 수능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가을이 되어 더웠던 날씨가 서늘해지니 한결 살 것 같더군요.
그리고 나는 다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J의 어린 남동생이 핸드폰을 가지고 놀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다 핸드폰이 있다는게 정말이네…… 싶어 새로 샀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누나 책상에서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누나 허락은 맡았냐고 물었더니 아니랍니다.
누나가 알면 화낼거라고, 돌려주게 달라고 해서 핸드폰을 뺏었습니다.
그것은 여태 J가 쓰던 것과는 다른 기종이었습니다.
분홍색의 좀 낡은 폴더로, 몇 년 전에나 유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일 년이 멀다하고 핸드폰을 바꾸는 J이기에, 나는 그것이 그녀의 옛 핸드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계속 위화감이 들더군요.
자세히 핸드폰을 살펴보니 당연히 왼쪽에 있어야 할 안테나가 오른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설마해서 폴더를 펴보았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자판이 뒤집혀진것은 물론 액정에 표시되는 것들, 심지어 회사 로고까지 거꾸로였어요.
그 순간 어쩐 일인지 J의 기묘한 행동들이 겹쳐 지나갔습니다.
이것이 기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머릿속에는 J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사실을 캐물을 계획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리고 생각했던대로, 그녀에게 폰을 건네며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핸드폰을 들고있자 사색이 되었던 J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한참동안 침묵하던 J는 말없이 핸드폰의 폴더를 열어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곧 그녀는 내 눈 앞에 폴더를 들이밀었어요.
나쁜것이 분명한 화질의 사진에는, 나와 J가 웃긴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 기억 나요?"
J는 그렇게 말했어요. 난 고개를 저었습니다.
맹세코 나는 단 한 번도 J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어요.
더군다나 저런 웃긴 표정으로는.
"기억할 리가 없죠. 이 사람은 선생님이 아니니까요."
J는 우울하게 말하며, 폴더를 접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한 구석에 놓인 전신거울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울을 어루만진 J가 일견 담담하게 입을 떼었습니다.

"그 곳에서 선생님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던 제 동료였어요."
J는 알 수 없는 말을 했습니다.
"이 지구에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이 있어요. 정확히는 지구가 두 개로 나뉘어져 있다고 봐야겠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내 멍청한 표정을 본 J는 희미하게 웃더군요.
"나 사실 조금은 털어놓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얘기하고나면 내 마음이 편해질까요?"
그리고 이어진 J의 말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말이에요 선생님, 이 거울 너머에서 왔어요.
믿기질 않죠?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어딨긴요. 바로 여기있잖아요, 진짜 J.
지금도 거울 너머에서 나를 보고있잖아요.
거울 안의 사람과 밖의 사람, 아니 구분이 무의미하긴 하네요.
당신들은 거울 밖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오히려 당신들이 안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거울 안의 사람과 밖의 사람이 서로 만날 때는 거울을 볼 때 뿐이에요.
거울 너머에서의 나는 불행했어요. 너무요.
이쪽의 J에게 못할 짓을 했다는건 알아요.
내 몫의 불행을 전가시켜선 안된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난 너무 힘들었어요.

거울 안과 밖이 완벽한 대칭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거울을 볼 때는 어느정도 그래요.
하지만 거울을 보고있지 않을 때는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요.
아니, 아주 다르진 않아요. 대체로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것 뿐이에요.
하지만 나처럼 예외는 있어요. 아니, 찾아보면 제법 될지도 몰라요.
아주 사소한 선택이 인생을 바꾸는 경우 말이에요.
거울이 비춰지지 않는 곳에서 한 선택이 안과 밖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놔 버려요.
거창한 선택도 아니에요. 큰 흐름은 닮아가는 법이니까요.
예를 들자면 오늘은 뭘 먹을까, 하는 하찮은 선택. 그게 인생을 바꾸더라고요.

우리 가족이 그랬어요.
내가 여섯살 때, 아빠는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외출하셨어요.
그리고 큰 교통사고를 당하셨죠.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던 트럭에 치이신 거예요.
하지만 이곳 J의 가족에겐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아마 이곳의 아빠는 그때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굶거나, 사내 식당에서 드셨겠죠.
그 후로 우리 가족은 엉망이 됐어요.
아빠는 반신불수가 되셨고, 병수발과 생활고를 못 이긴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어요.
겨우 열 살이었던 동생은 대뜸 엄마를 찾겠다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렇게 단 한 번도 행복한 적 없고 단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 없이 열 아홉이 됐어요.

나는 정말 음침한 애였어요.
마음을 터놓을 친구, 아니, 말을 섞을 친구조차 없었어요.
그런 내게 같은 반 여자애 하나가 다가왔어요.
그앤 말수가 적은 날 답답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마침내 내가 웃고 떠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기다려줬어요.
그애가 내 인생 최초의 친구였어요.
그렇게만 지냈다면 행복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난 끝까지 불행했어요.
그애가 좋아하던 남자애와 같은 부서에 들게 되었고 친해졌어요.
내 인생의 첫 친구가 그 여자애였다면 이 남자애는 첫사랑이었어요.
맞아요. 친구가 좋아하던 앨 좋아해버린 거예요.

알고보니 걔도 날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 남자애가 날 좋아하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요?
친구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해서 그애의 고백을 거절해버렸어요.
비밀로하고 싶었지만 그애가 날 좋아한다는 소문이 결국 친구의 귀에까지 들어갔어요.
그때부터 난 지독하게 왕따를 당했어요.
책이 찢어져있고 서랍에 쓰레기가 들어간건 정말 예사였어요.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누가 밀치기도 했고 청소시간에 걸레 빤 구정물을 쏟아붓기도 했어요.
죽고싶은 나날이었어요.
그 친구는, 아니 친구도 아니네요.
그 여자애는 자기가 날 괴롭히고 있다는걸 남자애가 알게되면 죽여버리겠다고 했어요.
네, 그래서 결국 걘 그 남자애랑 억지로나마 사귀는데 성공했어요.
난 친구랑 첫사랑을 동시에 잃은 거예요.

하지만 그앤 그걸로도 성이 풀리지 않았나봐요.
내가 도둑질을 했다고 누명을 뒤집어 씌우더라고요.
평소에 말 한 마디도 안 해봤던 여자애가 주번 순서를 바꿔달라길래 그러마 했던게 실수였어요.
난 졸지에 체육시간에 남의 지갑을 훔친 애가 되어버렸어요.
아무리 왕따를 당해도 꿋꿋히 버틸 수 있었던 건 앞으로는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때문이었어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 소외의 굴레를 벗을 수 있을까 하는. 그땐 나도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하지만 적어도,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어요.
친구의 지갑을 훔친 죄로 징계를 받고 생활 기록부에는 붉은 낙인이 찍혀버렸어요.
3년 내내 준비하던 수시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거예요.
선생님들은 흰 눈으로 나를 봤어요.
왕따에 가담하지 않았던 아이들마저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난 비참할 정도로 지쳐갔어요.
혼자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빠가 귀찮고 미웠어요.
병수발도, 병원비 마련하는것도 너무 힘들기만 했어요.
그러던 어느날, 나는 이상한 메일을 받았어요.

「거울 너머의 세상이 궁금하십니까?」

그 메일에는 거울 너머 세상을 들여다보는 법에 대해 적혀 있었어요.
거울 안, 우리도 우리가 밖이라고 생각해요, 의 세계는 당신의 삶과 비슷할 수도, 아주 다를 수도 있다는 짤막한 설명과 함께 말이에요.
방법은 크게 복잡하지 않았어요.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하룻동안 맑은 술에 담가둔 붉은 실을 거꾸로 걸어놓은 거울에 매어놓으란 거였어요.
그리고 난 이 세상에서 아주 행복하게 사는 J의 모습을 봤어요.

그때 이후로 날 지배하는건 질투와 동경이었어요.
하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건강하게 움직이며 일하시는 아빠, 초등학생 때부턴 본 적이 없는 엄마의 상냥한 미소, 그리고 죽은거나 다름없었던 동생의 개구진 얼굴을요. 상상만 해도 행복해졌어요.
그렇게 계속 새벽마다 거울 안의 세계를 들여다봤어요.
모두가 뒤집혀졌다는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어요.
끝없이 갈구하고 또 갈구했어요.
내가 저 거울 속의 J가 될 수 있다면.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오늘 이쪽 J에게 있었던 일을 비추어주던 평소와는 달리 잘 준비를 하는 J가 보였어요.
나는 J와 눈이 마주쳤어요.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것 같던 J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 가까이로 다가왔어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습니다.
그애와 내가 거울을 사이에 두고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단걸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질문을 해버렸어요.
"넌 지금 행복하니?"
잠깐동안 멍하니 나를 보던 J가 곧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어요.
"하나도. 성적도 안 오르고 되는 일도 하나 없고. 짜증나 죽겠어."
문득 나는 지금이라면 내가 저쪽으로 갈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울 속의 J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무언가가 만져졌습니다. 바로 J였어요.
나는 있는 힘껏 그애를 잡아당겼어요.
그 순간 청소기에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뒤바뀌었어요.
그래요, 난 이쪽 세계로 온 거예요.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반대쪽 세상의 나와 나 자신을 뒤바꿀 수 있는 순간은 현실에 불만을 품을 때 뿐이란걸요.
참 멍청한 계집애죠.
학교에 돌아오면 맞아주는 엄마, 슈퍼맨같은 아빠, 귀여운 동생.
친구들은 날 좋아해요. 여기서 난 인기가 많아요.
내가 포기했어야만 했던 남자친구는 내가 좋다고 쫓아다니고 있어요.
아무도 내게 아버지 병수발을 강요하지 않아요.
아무도 나를 친구 지갑이나 훔친 도둑년으로 보지 않고요.
내게는 빛나는 미래가 있어요. 뭘 해도 다 할 수 있어요.
이 모든걸 다 가지고도 행복하지 않다구요? 짜증나 죽겠다고요?
내가 그애를 나의 세계로 끌어당기지 않고 배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내가 처음 이 세계로 왔을때, 가장 기뻤던게 뭔줄 알아요?
바로 아침에 들려오는 엄마가 요리하는 소리였어요.
간밤에 있었던 일이 꿈일까봐 두려워 떨면서, 정말 꿈이라면 차라리 목을 매서 죽어버리겠다고 다짐하며 부엌으로 가자 엄마가 찌개를 끓이고 계셨어요. 웬일로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어났냐고 하셨어요.
식탁 의자에 앉아 신문을 읽고 계시던 아빠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머릴 쓰다듬어 주셨어요.
동생의 방으로 가보니 그앤 이불까지 걷어차놓곤 세상모르게 자고 있더군요.
이 기적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서 결국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네, 여기까지가 J의 이야기입니다.
정말 믿기지가 않죠? 나도 처음엔 그녀가 장난을 치는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내 눈 앞에 있는 J는 내가 알던 J가 아니라 거울 속에서 살아가던 J라는 것을요.

그밖에도 나는 J에게서 재밌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혹시 거울 속의 당신과 사진을 찍었을 때의 당신이 다르게 생겼다는 생강을 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 당신의 말이 맞아요. 좌우 대칭 때문이죠.
근데 그런거 말고, 이를테면 거울 속의 내가 더 늙어보인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J의 말에 의하자면 거울을 보는 순간을 제외하곤 안과 밖의 사람들은 다른 인생을 살기 때문에 누구 하나가 더 일찍 늙어버릴 수도 있다는군요. 굉장히 재미있지 않습니까?
아참, 조금 으스스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끔가다 이유없이 거울을 오래 보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거울 너머의 자신이 거울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런거라고 하더군요.
거울을 보는 순간만큼은 똑같은 표정,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된다면서요.

J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나는 J가 한 말을 따라 거울 속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을 시도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엔 잘 안 되었습니다. 한 번 더 해보니 거울이 서리라도 낀 듯 뿌옇게 흐려지더군요.
그리고 모든 것이 반전反轉된 세상을 보았습니다.
너무 몰라서 그 즉시 거울을 집어던져버렸지만요.
나도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시도해 보시려거든 해보세요. 운이 따른다면 거울 반대편 세상을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거울 너머의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


그리고 부디, 당신의 행운을 소중히 하세요.











기괴한담奇怪寒談
http://bbs.threadic.com/goedam_new/1372388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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