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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1677 추천 수 2 댓글 1

오랜 시간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한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얼핏 보면 수수해보지만 그렇지도 않은 그런 여자.

그 여자는 아름다우면서도 꾸밈이 없었다.
꾸밈이 없는 것이 아니라 포기처럼 보이는 날도 있었다.

여자로서의 포기. 어쩌면 그게 더 맞는 생각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때로는 편의점 안으로 찾아들어 물건을 샀다.
담배, 바나나 우유, 주스.

나름 손님임에도 이 여자는 얼굴을 한번 쳐다보는 일이 없었다.
여자는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개미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한번은 편지를 써서 마음을 전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편지를 쓰는 것까지는 쉬워도 전해주기는 어려웠다.

결국, 나같은 사람이 된다는 거 였나보다. 스토커.

나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뒤를 밟았다.
여자가 혹여 뒤를 돌아볼까 노심초사였지만 여자는 길을 걸을
때에도 곧잘 땅만 쳐다보며 걷고는 했다.

그녀의 집을 알아내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었다.

나는 다음날 열쇠수리공을 불러 집 문을 열고 그녀의 방을 들어가 보았다.

그녀의 방은 뭐랄까. 향이 없었다. 여자들의 냄새.
그리고 또 특별히 뭐라 콕 찍어 설명이 힘들었지만,
이곳은 여자의 방이라는 뉘앙스가 없었다.

꼭 여자들이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방에는 그 흔한 화분조차 하나 보이지 않았다.

커튼은 민무늬의 카키색 천 쪼가리가 볼품이 없었고,
침대와 이불도 순 카키색 옅은 무늬가 들어간 재미없는 물건들뿐이었다.

냉장고 안에는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 따윈 들어있지 않았다.
물, 음료수 하나, 언제부터 얼어붙어 있는지 가늠이 안 되는 피자 한 조각.

TV는 존재하지 않고, 17인치로 보이는 작아 보이는 모니터와
싸구려 컴퓨터가 책상도 아닌 조막만 한 작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옷장 속은 여자의 옷장이란 느낌을 풍기며 많은 옷이 들어있었지만
오랜 시간 잠겨있던 옷장의 향이 자욱하게 풍겨왔다.

확실히 내가 그녀를 스토킹하며 봐왔던 옷은 몇 벌 보이지 않았다.

방을 둘러보다 졸업앨범을 찾아 앨범을 뒤적이며 그녀를 찾았다.
졸업 사진의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이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아 금방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2008년 졸업생. 이름 정지영.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였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지금 모습을 보면 예상이 어려워 소스라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조금 의아스러운 건 지금의 모습과 상반되는 사진의 모습이었다.

반의 친구들과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감 있고 밝은 활기찬 고등학생의 모습.

책장에 들어있는 책이 졸업앨범과 몇 권의 소설이 전부였다.
허리춤까지 오는 작은 책장인데도 허전함이 느껴졌다.

컴퓨터를 켜자. 바로 윈도우 화면으로 전환되었다.

겨우 60기가 남짓의 하드디스크 내용물을 살살 뒤져보자
최근의 드라마 몇 편 이외에는 별다른 데이터가 없었다.

게임조차도 하지 않는 여자 같았다.

한참 방을 뒤져보고는 텅텅 비어있는 방의 살풍경이 마치 여자의 삶을 대변하듯 느껴졌다.
스토커로서 주제넘게도 나는 정지영이란 여자를 동정하게 되었다.

방을 좀 더 둘러보다 방의 키를 찾게되어 열쇠집을 찾아가 열쇠를 복사했다.
열쇠를 복사하고 그녀의 방에 다시 열쇠를 돌려 놓으러 가는 길. 길가에서
팔고있는 선인장 화분을 하나 샀다.

여자의 방에 열쇠를 돌려두고, 화분을 올려둘 그럴듯한 장소를 찾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화분을 책장에 얹어두었다. 허전했던 책장이
그나마 공간을 차지하며 약간은 쓸쓸함이 줄은 듯 보였다.

여자가 이 화분을 보고 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며 입가에 웃음이 돌았다.

며칠 뒤 그녀가 출근한 것을 확인하고 다시 그녀의 방을 찾아갔다.
현관에 서서 열쇠를 넣어 돌리니 휙 하고 열쇠가 걸림 없이 돌아갔다.

'조심 좀 하지...'

방에 들어서자 이상하게 방에서 은은한 여자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튼까지 꽁꽁 쳐 두었던 창은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해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무엇을 해볼까 고민을 하다가 그녀가 읽은 책들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이 들었다.
개중에는 여자가 편의점 일을 하면서 읽던 책도 있었다. '공중그네' 오래 된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이었다.

한참 동안 엎드려 책을 읽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리며 내가 방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을 자리에 돌려놓고 현관으로 향하는 거실에서 난 얼마 전 사뒀던 화분이 현관 신발장
위로 자리를 옮긴 것을 보았다.

'버리진 않았네?'

여자가 눈치채면 화분을 가져다 버릴 줄로만 알았다.
화분에 다가서니 포스트잇 종이에 정성껏 쓴 듯 보이는 글씨가 보였다.

'당신은 누구 신가요?'

"뭐야. 이 여자 스토커한테 누군지 묻는 거야?"

나는 별 희한한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신발을 신었다.
신발을 신고 현관을 열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안았던 현관문에
포스트잇이 한 장 더 붙어있었다.

'신고하지 않을게요. 또 오세요.'





-1부 끝-

 

 

별이 빛나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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