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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13.07.28 07:01

[threadic] 벚꽃, 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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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은 거의 대부분의 순간 동안 넋을 놓고 있는 쪽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는 그랬다.

그것이 가장 훌륭하고, 또 고통과 미련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늘하늘 내려온 벚꽃잎 하나가 뺨을 스치고 무릎 위에 살풋 내려앉는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 드리워진 연분홍빛의 벚꽃들과 옅은 푸른색의 하늘이 마치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왠지 몸이 으슬거려와서, 홍경은 거의 흘러내려가 있는 담요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가 속한 세상은,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해서 간혹 숨이 막힐 듯 하기도 했다.


그때 건물 외각으로 다가온 두 명의 간호사들에 의해 제법 무거웠던 정적이 깨졌다.

"자살광이야."

"제 정신이 아니지. 살려놓고 또 살려놔도 죽겠다며 난리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뒀으면 좋겠어."

사뭇 악의가 담긴 말이었다.

무언가가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홍경은 느릿하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모퉁이 너머로 간호사 두 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한 남자.


"자살광?"

홍경은 남자를 보며 방금 들었던 것을 나지막하게 되뇌여보았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자가 정확히 홍경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홍경은 가벼운 감정의 기복을 느꼈다.

그것은 의외였고 또 기묘한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남자의 눈동자는, 자살광이라고 불리는 것을 의심케 할만큼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뜻 괴리감이 느껴질만큼의 빛나는 쾌활함을 본 것도 같았다.


죽음이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언제나 곁에 있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홍경은 유독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루를 보낸만큼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졌다. 내뱉는 숨은 곧 생명이었고 혼이었다.

어린 소녀에게 주어진 과제, 즉 죽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어려운 것이었다.

홍경이 그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감각」을 잘라내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했다.

살을 자르고 뼈를 깎아내듯 기쁨을 죽이고 슬픔을 쓸어내어 버리는 것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고도 외로운 길에서 좌절하지 않게.

그것은 최소한의 방어기제였으며 훌륭한 회피 수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머무는 이곳 역시 최고의 도피처다.


그 자살광이란 남자를 다시 본 것은 며칠 후의 어느날이었다.

역시나 평소처럼 담요를 덮어쓴 채 허공을 바라보던 홍경의 앞에 초콜릿 바가 불쑥 내밀어졌다.

유리조각같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상쾌하게 웃고있는 자살광이 보였다.

"먹어, 좋아하잖아."

"네?"

"아……."

자살광은 의미모를 신음성을 흘리다 혀를차며 재차 초콜릿을 권했다.

"초콜릿은 누구나 좋아하는 거잖아요. 먹으면 일단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니까 먹어요."

홍경은 얼떨결에 초콜릿을 받아들지만 차마 입에 넣을 수는 없었다.

일단 자살광이란 남자가 건넨 것을 믿을 수 없었을 뿐더러

마치 감시하는 것 마냥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잠깐 망설이던 홍경은 이내 희미하게 실소했다.

'어차피 오늘내일 하는데, 정신병자가 주는 그깟 초콜릿이 뭐라고.'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마치 구겨넣듯 우적우적 초콜릿을 먹기 시작했다.

시선을 떼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던 자살광이 싱긋 미소지으며 그녀의 옆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곁눈질로 힐끗 훔쳐보던 홍경이 질문을 던진 것은 저도 모르게였다.

"왜 죽으려고 해요?"

말을 뱉어놓고서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대답을 듣고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나 자살광은 그저 정면만 바라본 채 웃을 뿐이었다.


"자살광이라며요. 왜 그렇게 죽고싶은데요? 왜요? 살고싶어도 못 사는 사람이 있는데?"

나처럼. 그러나 마지막 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홍경은 숨을 고르며 격해진 감정을 억눌렀다.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가진걸 포기해야하는건 아니야."

자살광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죽음을 대비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핑계지. 어차피 사는건 죽어가는 과정이야. 시한부란 끝을 알 수 있는지 없는지 단지 그 차이 뿐이잖아. 죽음의 준비따윈 전혀 필요없어.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을 하면 되는거야."

홍경은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 더구나 자살광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만 조금의 괴리도 없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홍경은 시선을 돌렸다.


"말은 잘 하시네요. 자살광 주제에."

자살광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어쩐지 씁쓸해보이는 웃음이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예쁜 아가씨."

느릿하게 몸을 일으킨 그가 손을 흔들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홍경은 작게 중얼거렸다.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기요, 자살광 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문제없어. 당분간은 자살같은건 안 할거거든."

구렁이 담 넘어가는듯한 남자의 말에 홍경은 기가 막히단 얼굴을 했다.

자살광이라 불리우는 이 남자는 그날의 기묘한 만남 이후로 어떻게 알았는지 홍경이 있는 곳마다 나타났다.


그리고는 그녀를 이리저리 들볶으며 끝없이 귀찮게 구는 것이다.

풀밭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독서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홍경의 삶은 이 남자로 인해 상당히 산만하고 요란하게 변했다.

처음 몇 번은 아예 대꾸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속을 긁는 말을 한다거나 흥미가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서 그녀가 대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간호사가 뭐라고 안 해요? 왜 남의 병동에 와서 놀아요. 정신병동 가요."

"정신병동은 싫어. 또라이들이 드글드글하거든. 개인적으로 미친놈은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야."

당신부터가 미친놈 같은데. 홍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자살광이 홍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몰핀 맞았지? 이젠 좀 살만해?"

"그럭저럭요."

무심코 대답을 하다 홍경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일상적으로 나오는 남자의 물음이 어색했다.

그는 병원복 소매를 난잡하게 걷어올리고 씩 웃었다.

"만약에, 병이 가신듯이 낫는다면 뭐부터 하고싶어?"

"네?"

"건강해진다면 뭘 하고싶냐고요."

홍경은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도서관에 가보고 싶어요. 발작 일어나고 병원에만 있어서 안 가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너도 참 별나다. 이렇게 책 곰팡내 퀘퀘하게 나는 곳이 어디가 좋단거야?"

자살광이 말했다.

"좀 조용히 해요. 아저씨가 여기서 제일 시끄러워요."

"야, 아저씨라니! 내가 이래뵈도 너보다…… 아니 됐다. 어쨌든 오빠라고 불러! 아저씨 무슨."

그가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자신보다 기껏해야 서너살 많아보이는 남자에게 아저씨라고 부른것은, 홍경의 작은 심술이었다.


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홍경의 말에 자살광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더니 다짜고짜 그녀를 끌고 병원 밖으로 탈출을 감행했다. 목적지는 인근의 시 도서관. 그래서 지금 그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당연히 반 강제로 끌려와버린 홍경에게 불만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도서관을 둘러보며 숫제 본인이 더 투덜거리는 자살광 때문에 불평할 타이밍을 놓치고 만 것이다.


계속 옆에서 끈질기게 말을 붙이던 자살광은 지겨워졌는지 자기도 읽을만한걸 찾아본다며 유아 서적 코너로 가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홍경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홍경이 고른 책의 목차를 다 읽을 때 쯤 남자가 이상한 동화책을 가지고 돌아왔다.

"내가 재밌는거 발견했다? 읽어줄까?"

"네에?"

"괜찮아, 작게 소근거리면 되지 뭐."

싱긋 웃으며 자살광은 책을 흔들었다.

줄무늬 고양이가 그려진 책의 상단에 붉은 글자로 「100만 번 산 고양이 」라고 적혀있었다.


사각사각 책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는 평일의 한적한 도서관.

햇빛과 뿌연 책 먼지가 가득한 책꽂이 뒤, 자살광과 홍경은 편한 자세로 주저앉아 함께 책을 보고 있었다.

잠깐 목청을 가다듬은 남자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100만 년 동안이나 죽지 않은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100만 번이나 죽고서도, 100만 번이나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멋진 호랑이 같은 얼룩고양이 였습니다.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고양이를 사랑하고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 고양이가 죽었을 때 울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한번도 울지 않았습니다……."


한 때, 고양이는 임금님의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임금님이 싫었습니다.

임금님은 언제나 전쟁을 하고 있었고, 고양이를 멋진 상자에 넣어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날아 온 화살에 고양이는 죽었습니다.

임금님은 고양이를 안고 울었습니다.

임금님은 전쟁을 멈추고 성으로 돌아와 궁전의 정원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한 번은 뱃사람의 고양이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바다가 싫었습니다.

뱃사람은 세계 곳곳의 항구에 고양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뱃사람은 축 늘어진 고양이를 안고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먼 항구 공원의 나무 아래 고양이는 묻혔습니다.


한 때, 고양이는 서커스단 마술사의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서커스 따위 싫었습니다.

마술사는 상자에 넣은 고양이를 톱으로 두동강 내고, 살아있는 고양이를 꺼내며 박수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진짜로 두동강이가 되었습니다.

마술사는 잘려진 고양이를 두 손으로 쳐들고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습니다. 

마술사는 서커스 천막 뒤편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한번은 도둑의 고양이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도둑이 싫었습니다.

도둑은 고양이와 함께 마치 고양이처럼, 컴컴한 마을을 살금거렸습니다.

개가 고양이를 보고 짖어대는 동안 도둑은 금고를 털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개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도둑은 훔친 다이아몬드와 고양이를 안고 큰소리로 울면서 어둠 속의 마을을 걸어다녔습니다.

도둑의 작은 뜰에 고양이는 묻혔습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의 고양이였던 때도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할머니를 싫어했습니다.

할머니는 고양이를 안고 하루종일 창문 밖을 내다 보았습니다.

고양이는 하루종일 할머니 무릎에서 잠을 잤습니다.

조용한 세월이 흘러 고양이는 늙어서 죽었습니다.

늙어서 몸을 잘 가누지도 못하는 할머니는, 늙어서 죽은 고양이를 안고 하루종일 울었습니다.

할머니는 창문 밖 나무 밑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한 번은 어린 소녀의 고양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고양이는 소녀가 싫었습니다.

소녀는 고양이를 업어 주고, 꼭 껴안고 잠에 들고, 고양이 등에 눈물을 닦았습니다.

어느 날, 소녀의 등에 업힌 고양이는 묶은 띠에 목이 감겨 죽었습니다.

머리가 흔들거리는 고양이를 안고 소녀는 슬프게 울었습니다.

그리고 집 뜰에 고양이를 묻었습니다.


이제 고양이는

죽는 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그 누구의 고양이도 아닌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도둑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고양이는 자기 자신의 고양이가 된 자기 자신이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어쨌든, 멋진 호랑이 같은 얼룩고양이였기 때문에

고양이는 멋진 도둑 고양이가 되었습니다.



어떤 암고양이건 고양이의 짝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커다란 물고기를 선물로 바치는 고양이도 있었고

통통하게 살찐 쥐를 바치는 고양이도 있었고

다래열매를 선물하는 고양이도 있었고

멋진 호랑이무늬 털을 핥아주는 고양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다른 어떤 고양이보다 자기자신이 좋았습니다. 

고양이는 귀찮다는 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이런 게 다 뭐야 시시하게!"


그런데 딱 하나, 고양이를 거들떠 보지 않는 고양이가 있었습니다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털을 가진 고양이 였습니다.

고양이는 흰고양이 앞에 가서 말했습니다.

"난 100만 번이나 죽었었다구!"

흰고양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습니다.

"그렇구나."

고양이는 화가 났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다음 날도 고양이는 흰고양이에게 말했습니다.

"넌 아직 한번도 죽어본 적 없지?"

흰털 고양이는 "그래." 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양이는, 흰고양이 앞에 가서 빙그르 재주를 넘었습니다.

"난 마술사의 고양이 였던 적도 있었어."

"그래. 그렇구나."

"나는 말이야, 100만 번이나...."

고양이는 말을 멈추고 흰고양이에게 다가갔습니다.

"네 옆에 있어도 되겠니?"

흰고양이는 역시 가볍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러렴."

그때부터 고양이는 언제나 흰고양이 옆에 있었습니다.


흰고양이는 귀여운 아기고양이를 많이 낳았습니다

고양이는 이제 더 이상 "난 100만 번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자기 자신보다 흰고양이와 아기 고양이들을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기 고양이들은 자라서 뿔뿔이 어딘가로 가 버렸습니다.

고양이는 흰고양이와 둘이 남았습니다.

"저 놈들도 멋진 도둑 고양이가 되었군."

고양이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하며 흰고양이는 가릉가릉 부드러운 소리를 냈습니다.

흰고양이는 점점 늙어갔고 더 부드럽게 가릉가릉 목을 울려 소리를 냈습니다.


고양이는 그 소리를 들으며

흰고양이와 언제까지나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흰고양이는 고양이 옆에서 조용히 잠들었습니다.

움직이지 않는 흰고양이를 안고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나고 또 밤이 오고 아침이 왔습니다.

고양이는 100만 번이나 울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지난 어느 한낮에

고양이는 울음을 그쳤습니다.

흰고양이 옆에서 고양이는, 조용히 움직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동화 아니었어요? 뭐가 이렇게 슬퍼요."

홍경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물었다. 코맹맹이 목소리가 나와 퍽 우스웠다.

"슬퍼?"

"그럼 안 슬퍼요? 너무 짠한데요."

자살광은 잠깐 초점을 홍경의 뒤로 비스듬히 맞추며 의미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도 처음엔 슬펐는데…… 이젠 그저그래."

"아저씨는 방금 이 책 발견했다고 했거든요?"

"그런가?"

남자는 하하 웃었다.


갑자기 짓궂은 얼굴을 한 자살광이 홍경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사실 나도 백만번 죽었다?"

"네네, 난 천만번 죽었어요."

홍경이 장난스레 그의 가슴팍을 때리며 응수했다.

남자는 역시나 웃음기 띈 얼굴로 "정말인데……."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 후로 홍경이 만족할만큼 책을 읽는 동안, 남자는 평소 보여준 산만한 행동과는 달리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녀의 옆에 앉아 창 밖만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고 검푸른빛이 하늘을 점점 덮어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는 것이다.


"이제 가요."

홍경이 마지막 권을 덮으며 말했다.

"다 읽었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책더미를 받아든 자살광이 먼저 걸어갔다.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용기를 내어 남자를 불렀다.

"저기, 아저씨!"

"응?"

남자가 돌아보았다.

"야, 아저씨가 아니라 오빠라고 내가……,"

"고마워요."

"뭐?"

동그랗게 커진 그의 눈이 어쩐지 우스꽝스러웠다.

"고맙다고요. 나 사실 정말 도서관에 와보고 싶었어요. 근데 용기를 못 냈어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서. 계속 내 몫이 아니라고만 생각하고 미뤄버린 거예요. 여기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잠깐 숨을 몰아쉰 홍경이 이어 말했다.

"어차피 난 얼마 안 가서 죽을거예요. 사실 도서관 뿐만이 아니에요. 내 약해빠진 심장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뭐든 다 해보고 싶어요. 죽기 전에. 그게 내 진심이었던 거예요."

멍하니 그녀를 보던 자살광이 갑작스럽게 몸을 돌렸다.

다시 나온 목소리는 잔뜩 잠겨있었다.


"나도 같이 갑시다, 아가씨. 난 건강함이랑 남아도는 시간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에 조금이나마 울음기가 묻어있는 것 같았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야해."

"아, 그 목록같은거 말이죠?"

"말하자면 그렇지?"

자살광은 제가 더 신이 나서 종이에다 슥슥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언뜻 보니 이보다 더 심할 수는 없는 악필이다.

"기타 배우기? 나무 심기? 이건 뭐야, 사진 100장 찍어주기? 버킷 리스트 치곤 소소하네요."


"동물원가기도 넣어요. 나 동물원 가보고 싶단 말이에요."

홍경의 요구에 남자는 입가에 주름을 잡았다.

"꼭 가야해? 동물들은 냄새나고 정신없기만 하다고."

"그래도 좋은데요. 내가 얼마나 동물을 좋아하는데. 그리고 바다도 가보고 싶고 구경만 해도 놀이공원도 가고 싶어요."

"아, 바다 좋네. 바다. 동물원 말고 바다가자. 나 바다 한 번도 못 가봤다고."

"둘 다 하면 되잖아요."

"그럼 바다를 우선순위에. 됐지?"


자살광과 함께하는 순간은 의외로, 굉장히 즐거웠다.

홍경의 무미건조한 인생에서 최근의 한달은 여태까지와 비할 바 없이 호들갑스럽고 유쾌했으며 역동적이었다. 조금씩 시간을 할애해서 그와 함께 기타를 배우고 사진을 찍어나갔다.

그는 정말로 이상한 남자였다.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전부 알고 있었다.


"먹어."

남자가 각설탕을 반개 쪼개 넣은 커피를 내밀었다.

홍경은 다소 복잡한 눈으로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반 개는 잘 안 넣지 않아요? 하나를 넣지."

자살광은 그저 웃으며 커피잔을 재차 권할 뿐이었다.


「다음에는 바다에 가자. 내가 꼭 데려다주마.」


역광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남자의 얼굴 뒤로, 목을 길게 내빼고 있는 기린이 보였다.

자살광?

굉장히 이질적인 그 장면을 보며 홍경은 낮게 뇌까렸다.


「나무도 심자. 아무 소용 없을테지만. 왜 이런 말도 있지 않냐.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


그래도 혹시나 모르잖아. 혹시나.

어쩐지 미묘하게 희망찬 얼굴로 남자가 덧붙였다.


"야, 이런데서 자면 감기걸려."

아득한 의식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깊고 따뜻한 심해 속에서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기분에 홍경은 숨을 몰아쉬었다.

육신이 자각되기 시작하자 추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왔다.

자신은 여느 때처럼 벚꽃나무 아래에 기대어 있었다. 아마 책을 읽다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꽃샘 추위가 아직 덜 가신 모양인지 얇은 병원복 위로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뭘 그렇게 죽은듯이 자냐."

싸구려 약으로 탈색한 결 나쁜 머리, 귀에 여러군데 박혀있는 피어싱들, 창백한 얼굴…….

그 불량한 모습은 영락없는 자살광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이질적이다.

홍경은 담요를 끌어올려주는 자살광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니면 이제야 이 몸의 매력을 발견한건가."

실 없는 농담을 하며 자살광은 히죽 웃었다. 그러나 홍경은 따라 웃지 않고 그를 계속 응시했다.

그녀의 심각한 시선에 자살광은 천천히 입꼬리를 내리고 보기 드문 표정없는 얼굴을 했다.

"왜 죽으려고 해요?"

처음 만났을 때 물어본 적이 있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의 대답은 어땠던가. 홍경이 자각하지 못하게 뜬금없는 소리로 말을 돌려버렸었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안 죽으려고 하잖아."

다시 불량하게 웃는 얼굴로 돌아온 자살광이 어깨를 으쓱했다.

홍경은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왜 죽으려고 했어요?"


"정신병자한테 그런걸 묻는건 실례란 생각 안 들어? 의사들도 예민한 문제는 조심조심 다루는데."

난 민감한 환자라구. 역시나 실없는 소리가 나왔다.

"말해주세요. 실례라는건 알지만 듣고싶어요. 살고싶어도 못 사는 사람에게 적선한다 생각해요."

"적선이라니."

계속 웃는 낯이었던 자살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런 소리 하지마."

"알았어요. 그럼 베푼다 치고 말해주면 안돼요?"

홍경의 고집에 자살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이 얘길 해준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 뿐인데 말이야……."

그녀의 옆에 털썩 주저앉은 남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처음엔 동생 때문이었어."


"동생이요?"

"동생이 눈 앞에서 아주 무참히 죽었거든. 내가 그앨 찾아냈을 때는 윤간당하고 살해당한 직후였어."

마치 댐이 무너진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암울한 과거에 홍경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해요. 괜히 물었네요. 이젠 대답 안 해주셔도……."

"아냐. 찔끔 말했다가 다시 다무는게 훨씬 찜찜해."

시원하게 되받아친 남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질 없는 희망에 계속 죽으려고 했어. 근데 잘 안 죽어지더라고. 한 동안은 폐인처럼 지냈지."

부질없는 희망? 홍경은 작은 의문을 느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남자의 말에 의문은 금방 잊어버렸다.

"꽤 오래 그 짓을 반복하다…… 그만 뒀어. 정말 부질없다는걸 알았거든. 아니, 그보다 살고싶은 마음이 생겨버렸지. 그거 아냐? 인간은 굳이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동물이란거?

보살펴 줄 사람보다 보살펴 줘야할 사람이 있을 때 안정된다는거?"


자살광은 잠깐 말을 멈추고 발을 앞 뒤로 까딱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있지만 어쩐지 말하기가 힘들어보였다.

"근데 그 애도 죽어버렸어. 어차피 나아질건 아무것도 없다는거, 내가 바꿀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단걸 알면서도 죽어야겠단 생각밖에 없었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지금은 가라앉았지만 난 또 죽으려고 할거야."

"애인이었어요?"

어쩐지 그런 것 같아 홍경이 질문했다.

"아니. 물론 내가 좋아하긴 했지. 그렇지 않고서야 동생에 대한 악몽을 떨쳐버릴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는 또 흘러내려간 홍경의 담요를 다시 덮어주었다.

"그애한테 좋아한다는 소릴 들은건 딱 한 번 뿐이야. 그 오랜 시간 중에서 말이야."

"그 사람이랑 꽤 오래 알고 지냈나봐요?"

"아마도……."

애매모호하게 말 끝을 흐리던 자살광은 다시 평소의 실실거리는 얼굴로 돌아왔다.


"그애도 심장이 아팠어. 주위에 벽을 쌓아놓고 들어오지 말라고 온몸으로 외치곤 했지. 사실은 외로워서 울고있는 고양이 주제에 말이야. 너처럼."

그제사 홍경은 자살광의 이유없는 호의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과거 좋아했던 사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했지만 어쩐지 가슴 한 켠이 씁쓸해졌다. 서운함일지도 몰랐다.

'나를 통해서, 그 사람을 보는건가?'

아무렴 어때. 홍경은 생각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바다다!"

자살광이 버스 창으로 고개를 쭉 내빼고 유쾌하게 외쳤다.

커다란 목소리에 버스 안 승객들이 모두 그들 쪽을 쳐다봐서, 홍경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자살광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다 보잖아요. 목소리 좀 낮춰요. 그리고 고개 내밀지 마요. 잘못하면 목 잘린다구요."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죽이지 않냐? 나 서울 토박이라 바다는 처음이라고."

"그래도 촌스럽게. 다른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워요."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자살광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홍경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대로 말해봐. 너도 바다 처음이지? 그치? 그런 주제에 빼기는."

"아, 아니에요! 바다 가봤어요!"

"거짓말. 그럼 어디 바다 가봤는데?"

"어…… 그게……."

자살광이 헹, 하고 얄밉게 웃었다.

"것봐. 우린 같은 내륙 촌놈이라고. 누가 누굴 촌스런 사람 취급?"


"야, 그리고 거기에 작은 섬도 있다니까, 거기서 나무 심자."

"네? 나무요?"

"그래. 버킷리스트에 같이 적었잖아. 기타도 배워야지. 여기 이 기타 안 보이냐. 사진도 찍고."

이게 다 추억이란다, 꼬마야. 자살광이 옆에 기대둔 케이스를 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등에 맨게 뭔가 했더니 기타였어요? 이상하게 짐이 많다 했네."

홍경이 중얼거렸다.

자살광과 그녀는 봄이 다 끝나갈 즈음에 바다를 향해 출발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자살광의 고집과 거기에 마지못해 동조하는 홍경만 있을 뿐이었다.

바다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홍경은 가벼운 혼란을 느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그의 고집 아닌 고집에 휘둘리는 자신.

평소 그녀의 성격에 비춰보자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지만 크게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마음이 가벼워져서,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은 자살광보다는 그녀 자신일지도 몰랐다.

'어차피 곧 죽을건데. 이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때.'


몸이 아픈 홍경은 백사장에 앉아 바다에 들어간 자살광이 마치 커다란 개처럼 노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자살광은 바다에 처음 와봤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셔츠가 흠뻑 젖을 때까지 첨벙거리며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다 홍경이 떠올랐는지 축 젖은 채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가까이 온 자살광에게선 비릿한 바다내음이 났다. 바닷물에 젖은 그의 다리에 모래 알갱이들이 들러붙어 있었다.

"발 담그는 정도는 괜찮지? 너도 바다 들어가고 싶잖아."

다 안다는 듯 웃은 자살광이 홍경의 두 손을 잡아 일으켰다.


첫째날은 바다에서 놀았고 둘째날은 기본적인 기타의 운지법을 배웠다.

모든 악기가 그렇듯 기타라는 것이 하루 이틀로 완성되는 악기가 아니기 때문에 홍경과 자살광의 목표는 가장 기초가 되는 코드 몇 개를 배우고 간단한 곡을 연주해보는 데 있었다.

자살광은 의외로 기타를 제법 칠 줄 알았다. 전문가랄것까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못 들어봐줄 정도는 아니었고, 어지간한 곡은 무난하게, 때로는 퍽 듣기 좋게 치는 것이었다.


셋째날에는 비가 왔다. 홍경과 자살광은 숙소에서 간단한 음식을 해먹고 하루종일 기타를 연습했다.

그렇게 그녀의 인생 첫 여행은 흘러가고 있었다.


넷째날의 아침이 밝았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홍경은 잠기운에 취한 채 숙소의 거실로 나왔다.

요 며칠과는 달리 자살광은 거실에 없었다. 방을 기웃거려보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고개를 돌리던 그녀는 커튼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자살광이었다. 그는 발코니에 우뚝 서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 언젠가 보았던 것 같은 침체된 얼굴이었다.

"뭐해요?"

"응? 아. 잠깐 바람좀."

입꼬리가 끌어당겨졌다. 자살광은 작위적이고도 어색한 얼굴을 하고선 웃었다.


정오가 되어 숙소에서 나올 때까지 자살광의 낯빛은 우울했다.

홍경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지었으나 그것은 굉장히 억지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난데없는 변화가 몹시 불편해서 밥께 밥을 먹는동안 밥알을 코로 삼키는지 입으로 삼키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묘목을 심으러 출발할 때까 되자 자살광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생각없고 마냥 즐거워보이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홍경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고, 이런 불편한 기분으로 기념비적인 하루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짐 안 가지고 나가요? 또 숙소에 들르려면 귀찮잖아요."

묘목만 달랑 들고 출발하려는 자살광을 보며 홍경이 물었다.

잠깐 표정을 굳히던 자살광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무겁잖아. 다시 와서 가져가면 되지 뭐."

"하지만 산은 여기랑 정 반대잖아요? 다시 왔다갔다하는게 더 힘들것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이 오빠가 다 들어줄테니까."

그러고는 이내 허탈하게 웃는 것이었다.


바다 반대쪽의 산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어딘가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곳이었다.

자살광이 삽으로 구멍을 파면 홍경이 그곳에 묘목을 묻고 흙을 덮었다.

대지에 한 생명을 깃들게 하는 작업은 힘들면서도 굉장한 뿌듯함을 가져다주었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나무의 꺼슬한 생명력이 어쩐지 감동스럽다.

나무와 땅에서 향긋하게 올라오는 냄새가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홍경은 정말 오랜만에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때 플래쉬가 터지며 사진이 찍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카메라를 꺼낸 자살광이 웃고 있었다.

"사진, 많이많이 찍어두기로 했잖아."

"도촬이에요 그건! 어디 봐요, 저번처럼 또 이상한 표정으로 눈 감은거 아니죠?"

"어라, 안되는데."

얄밉게 웃으며 자살광이 카메라를 머리 위로 휙 치켜들었다.

"것봐, 또 이상하게 나왔어. 보자구요!"

잡으려고 뛰어보았지만 요리조리 피하는 자살광에게서 카메라를 빼앗기엔 무리가 많았다.


여행을 시작한 날부터 자살광은 틈만 나면 그녀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100장을 찍자는 말이 거짓부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중엔 눈을 감고있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인 것이 많아서 홍경은 불만이었다.


흙 묻은 손으로 이리저리 뒤엉켜 투닥거리던 그들은 어느새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서로의 바보같은 꼴을 보며 자살광과 홍경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몸싸움을 하느라 지친 그들은 흙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에서 꺼낸 캔을 딴 자살광은 그것을 홍경에게 건넸다.

"이번엔 많이 웃는구나."

그가 문득 말했다.


"이제 돌아가면…… 다음엔 뭘 하고 싶어?"

자살광은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동물원 가야죠, 동물원! 난 태어나서 동물원 한 번도 못 가봤다니까요."

"그래……."

말꼬리를 흐리며 그는 흐릿하게 웃었다.

"근데 아저씨, 왜 아까부터 그렇게 시계를 봐요? 나랑 있는게 지루해요?"

홍경이 심통난 얼굴로 자살광을 흘겨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자살광은 아까부터 계속 손목만 흘낏거리고 있었다.

마치 약속시간이 지나가버릴까 초조한 사람처럼.

"응? 아……."

자살광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얼굴을 했다.

본인도 자신이 시계를 끊임없이 보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안 듯 했다.


"빌어먹을."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뜨린 자살광이 시계를 풀어 가방에 쑤셔넣었다.

"자, 이제 안 봐. 계속 안 볼거야. 하루종일. 됐지?"

그는 양 손바닥을 펴보이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잠깐동안 적막이 그들 사이를 맴돌았다.

"홍경아."

자살광의 나직한 목소리에 홍경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들이 만난 이래 처음이었다.

"내 이름 알았어요?"

물론 알고자하면 못 알 것도 없다.

하다못해 간호사들이 그녀를 부르는 것만 주의깊게 들어도 알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어쩐지 그런 것과는 다른, 그 안에 내포된 아주 친근하고 익숙한 무언가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내 이름이 뭔줄 알아?"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홍경을 보며 자살광은 슬며시 웃었다.

"이번에도 실패했지만…… 그래도 기억해줘라. 김서결 딱 세 글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쓸쓸하게 웃은 자살광이 홍경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이번에도 100장은 못 채우게 됐네. 이번만은 채우고 싶었는데."


「다음에는 바다에 가자. 내가 꼭 데려다주마.」

「나무도 심자. 아무 소용 없을테지만. 왜 이런 말도 있지 않냐. 내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노라.」


홍경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자살광에게 안긴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저씨…… 혹시 전에 나 본 적 있어요?"


명치께가 찌르르 아파왔다. 누군가 숨통을 틀어막는 듯 가슴이 조여온다.

답답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중력이 육신을 짓누르듯 묵직해졌다.

"바보야, 그걸 이제 알았냐."

자살광은 어느새 울고 있었다. 표정없는 얼굴을 타고 눈물이 툭툭 떨어져내렸다.

"다음엔 뭘 하고싶어?"

자살광이 낮게 중얼거렸다.

"동물원은 안 돼.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란 동물은 다 봤다고. 이제 나무도 심고 바다도 가봤고 기타도 쳐봤으니 또 뭘 할까? 응?"

둔통은 이제 가슴을 지나 어깨와 양 팔로 번져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준비해오던 순간이 온 것이다.

그러나 홍경은 상황에 맞지 않게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동물이란 동물은 다 봤다구요? 거짓말, 난 동물원 한 번 못 가봤는데."

"갔다 뿐이겠냐. 내가 동물들 얼굴을 분간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자살광의 목소리에 조금씩 물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조금 떨어져 고개를 든 홍경은 자살광의 얼굴을 그늘지듯 덮고있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보았다. 그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시간들이 마치 집어삼키듯 그를 덮쳐왔던 것이다.

마치 진공의 관 속에 들어간 것처럼 호흡이 막혀왔다. 진공 속을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지고, 마치 졸린 것처럼 서서히 힘이 빠져갔다.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홍경은 자살광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기억 좀 해달라고, 이 무심한 아가씨야. 내 이름은 김서결이야. 잊으면 안 돼.」


언제인지 알 수 없는, 과연 이 땅 위에 존재했는지 모르는 어느 시간 속, 그녀는 이름을 기억해달라고 말하는 사내에게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아마 다짐했던 것 같다. 꼭 기억해주겠노라고.


옷자락을 움켜 쥔 홍경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자살광은 차갑게 식어가는 그녀를 안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입에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엔 뭘 하고싶어? 응? 다 들어줄게. 니가 해보고 싶었던거 여태 못했던거 다 하게 해줄게. 기억 못 해도 상관없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즐겁다면 계속 하자. 동물원 또 가고싶어? 그럼 또 데려다줄게.

그러니까 대답 좀 해봐, 응? 말 안 하면 또 내가 가고싶은 곳만 갈거야. 동물원 안 갈거라고. 내가 하고싶은대로 해도 좋아? 아니다. 넌 또 동물원에 가자고 하겠지?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할거야……."

홍경을 비척비척 땅에 내려놓은 자살광이 가방 속에서 신문지로 싸여진 칼을 꺼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그것은 무엇이든 갈라버릴 것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자살광은 미소지었다.


죽음은 끝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인간은 정말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러나 때론 인생의 소실점이 시작점이 되기도 한다. 극단적인 소멸이자 최후인 죽음이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한 일이다.

분명, 아이러니한 일이다.


신은 계산 없이 선물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은 꽤나 뒤늦게 깨달아졌다.

거기에 더해, 그것이 신의 선물이 아니라 악마의 장난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아무리 뛰고 뛰어도 늦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그의 여동생은 언제나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조금 빠르게 뜀박질을 한다고 달라지는건 없었다. 이미 모든 일은 끝난 후였다.

탈진할 정도로 뛴 날에는 동생이 숨을 막 거두는 순간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달라지는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 역시 없었다.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질없는 희망에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불러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아닌 악몽의 재래일 뿐인 것이다.

정확히 백 스물 다섯번째 죽음을 반복하던 어느날, 그는 깨달았다.

그는 그저 시간의 틈 속에 갇혔을 뿐임을.

이것은 생을 통틀어 가장 불행했던 순간으로 되돌려주는 악마의 상냥한 호의였음을.


홍경은 거의 대부분의 순간 동안 넋을 놓고 있는 쪽이었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는 그랬다.

그것이 가장 훌륭하고, 또 고통과 미련이 없는 방법이었다.


하늘하늘 내려온 벚꽃잎 하나가 뺨을 스치고 무릎 위에 살풋 내려앉는다.

고개를 드니 머리 위에 드리워진 연분홍빛의 벚꽃들과 옅은 푸른색의 하늘이 마치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

왠지 몸이 으슬거려와서, 홍경은 거의 흘러내려가 있는 담요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가 속한 세상은, 너무도 고요하고 조용해서 간혹 숨이 막힐 듯 하기도 했다.

그때 건물 외각으로 다가온 두 명의 간호사들에 의해 제법 무거웠던 정적이 깨졌다.

"자살광이야."

"제 정신이 아니지. 살려놓고 또 살려놔도 죽겠다며 난리니. 차라리 죽게 내버려뒀으면 좋겠어."

사뭇 악의가 담긴 말이었다.

무언가가 신경을 갉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홍경은 느릿하게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모퉁이 너머로 간호사 두 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앞을 느릿한 걸음으로 지나가는 한 남자.


"자살광?"

홍경은 남자를 보며 방금 들었던 것을 나지막하게 되뇌여보았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남자가 정확히 홍경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홍경은 가벼운 감정의 기복을 느꼈다.

그것은 의외였고 또 기묘한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호기심이었던 것이다.

남자의 눈동자는, 자살광이라고 불리는 것을 의심케 할만큼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언뜻 괴리감이 느껴질만큼의 빛나는 쾌활함을 본 것도 같았다.


남자는 미소지었다.

"안녕."


바람이 불자 푸른색 하늘, 그 위를 수놓고 있는 분홍빛 벚꽃잎이 마치 봄비처럼 떨어져내렸다.

벚꽃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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